[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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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 권우상
  • 승인 2018.11.15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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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회

당나라군 병선이 펼친 돛이 백마하(白馬河)를 뒤덮고 연이어 도달하면서 당나라군이 공격하자 끝까지 싸우던 대륙백제군은 무너지고 당나라군은 배로 강으로 들어가 강과 뭍에서 대륙신라군과 협세하여 곧바로 진도성(真都城)으로 20여리를 공격해 왔다. 살아있는 대륙백제군이 다시 온힘을 기울여 나당연합군에 대항해 싸웠지만 패하여 성안으로 달아나고 나당연합국이 추격해 오자 대륙백제군의 대장 니식장(禰植将)과 여러 성주가 항복하자 당나라 군사들는 이들을 체포하여 모두 당나라로 압송해 보냈다.

의자왕에게는 여러 부인이 있었고 슬하에 41명의 서자(庶子)가 있었다. 의자왕의 장남은 부여 융(隆,) 둘째 아들은 부여 풍(豊), 셋째 아들은 효(孝)인데 효가 태자 자리에 올랐다. 태자가 부여 융(隆)에서 부여 효(孝)로 교체된 것은 두 세력간에 정치적 반란이 일어나 부여 융(隆)의 세력이 제거되었기 때문이었다. 의자왕의 넷째 아들은 부여 태(泰), 여섯째 아들은 부여 용(勇), 일곱째 아들은 부여 궁(躬), 여덟째 아들은 부여 충승(忠勝), 아홉 째 아들은 부여 충지(忠志)였다.

대륙백제가 나당연합국과 싸우면서 잡은 포로는 신라군은 2천여 명, 당나라군은 600여 명이었는데 이들을 모두 대륙백제가 지배하고 있는 왜지(倭地)의 나라백제(奈良百濟)로 송치했다. 나당연합군에게 패한 대륙백제에서는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당나라 장수 유인궤는 백마하(白馬河)를 건너 도성(소부리)으로 진입할려고 하자 대륙백제 부흥군의 지휘관 복신은 군사를 집결시켜 임존성에 주둔했고 공격해 오던 나당연합군도 8천여 명의 군사를 잃은 탓에 쉽게 진격하지 못하고 일단 후퇴했다.

그런데 이무렵 대륙신라 전역에서는 역병(疫病)이 크게 돌아 병력을 지원하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이 기회를 틈타 백제부흥군은 두량윤성 남쪽에 주둔하고 있던 대륙신라군을 기습 공격하여 크게 이기자 다시 유주성(柔州城)을 공격해 오는 대륙신라군과 싸워 패퇴시켰다. 그러자 대륙백제부흥군의 사기는 크게 올랐고 사태를 지켜보던 주변의 여러 성주들이 대륙백제 부흥군에 가세하는 고무적인 결과를 얻었다.

이렇게 되자 당나라군은 소부리군(사비성)에는 일부 군대만 남기고 웅진성으로 도독부를 옮겼다. 하지만 대륙백제 부흥군은 웅진성을 거세게 공격하며 성을 포위하자 웅진성에 주둔한 당나라군은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 채 고립되는 상황에 놓여 식량을 구할 수가 없었다. 대륙백제 부흥군의 지휘관 복신은 왜지의 나라백제에 사람을 급파하여 왜왕(倭王)에게 원군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지만 이 문제를 논의하던 왜왕 제명천황이 죽는 바람에 대륙백제 부흥군을 도와 원군을 보내자는 장수 근강조(近江朝) 세력은 반대파에 밀려 흐지부지 되어 가고 있었다. 이때가 서기 661년 7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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