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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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 권우상
  • 승인 2018.11.16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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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회

그해 9월 대륙신라군은 대륙백제 부흥군을 토벌하기 위해 부흥군이 집결하고 있는 옹산성을 공격하자 대륙백제 부흥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배하자 부흥군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전쟁을 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의자왕의 아들 부여 풍(豊)은 장수 근강조(近江朝)를 총사령관으로 왜군 1만2천을 이끌고 왔다. 백제부흥군으로서는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것과 같았다.

1만2천의 원군을 얻은 대륙백제 부흥군은 웅진성으로 진격하여 백마하(白馬河)의 지류인 금하(金河) 남쪽에 진을 치고 대륙신라군과의 일전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대륙백제 부흥군 내부에서는 복신과 도침이 서로 주도권을 잡을려고 불화가 생겨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도침이 살해되자 도침을 따르던 군사들은 복신에게 크게 반발하는 등 백제부흥군의 내분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이러한 백제부흥군의 내분을 알아차린 대륙신라군은 백제부흥군을 공격해 왔다. 이 전쟁에서 백제부흥군은 크게 패했다. 그러나 백제부흥군은 백마하(白馬河)에서 나당연합군과 일전을 벌리기 위해 대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하지만 나당연합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의자왕의 둘째 아들 부여 풍(豊)이 이끌고 있는 백제부흥군은 크게 패하여 일부 군사들은 고구려로 도주했고 나라백제(奈良百濟)의 장수 근강조(近江朝)도 출병한 군사와 함께 왜지(나라백제)로 돌아갔다.

부여 풍(豊)은 중국대륙에서 백제부흥군을 이끌던 복신을 칼로 목을 쳐 죽인 후 부흥군의 수장이 되었는데 부여 풍(豊)이 복신을 죽인 이유는 복신이 도침을 살해한 데다가 부흥군 내부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였다. 결국 백제부흥군을 이끌던 부여 풍(豊)은 대륙 신라군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했고 임존성(任存城)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부흥군의 지휘관 혹치상지를 비롯하여 상여, 지수신 등 여러 장수들도 전의를 상실한 나머지 향후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당나라 장수 유인궤는 은밀히 백제 부흥군의 주둔지인 임존성(任存城)에 밀사를 보내어 흑치상지와 상여, 지수신 등의 장수를 설득하여 항복을 종용했다.

당나라 장수 유인궤는 이들이 항복하면 높은 벼슬을 주겠다는 말로 회유하자 혹치상지와 상여는 유인궤의 말에 귀가 솔깃해져 항복을 할려고 했으나 장수 지수신은 유인궤의 말이 거짓이라고 하면서 항복을 거부하고 고구려로 달아났고, 혹치상지와 상여는 대륙백제 부흥군을 이끌고 나당연합군에 항복하자 3년동안 집요하게 전개되었던 중국대륙에서 백제 부흥군의 활약은 663년 막을 내렸다.

이 무렵 당나라 고종은 유인궤의 요청을 받아 들여 좌위의 장수 손인사에게 8천여 명의 군사를 내주고 대륙신라에 가도록 하는 한편 의자왕 아들 부여 풍(豊)을 웅진도독으로 삼도록 하였다. 유인궤가 부여 풍(豊)을 웅진도독으로 삼고자 한 것은 백제 유민들의 반발을 줄이기 위한 계략이었다.

중국대륙에서 백제부흥군이 궤멸되자 한반도 신라 조정에서는 고구려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신라의 문무왕이 왕위에 오늘 무렵 당나라의 고종은 고구려를 공격할 계획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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