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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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 권우상
  • 승인 2018.11.21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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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회

싸움은 시간이 갈수록 사상자가 속출하면서 가야국에 불리했다. 가야국은 사상자가 점점 늘어나 더 이상 싸울 군사가 없었다. 많은 희생자를 낸 가야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결국 가야국(伽倻國) 아기스다왕(秋津田王)은 나라백제의 장군 젠지사부로(建支三朗)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하였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백제(奈良百濟)는 일본열도에 있는 가야국 영토를 차지하여 나라백제 영토는 대우반도(大隅半島)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나라백제(奈良百濟)는 천지천황(天智天皇)과 그의 아들 천무천황(天武天皇) 대(代)에 오면서 왕족과 백제지배층과 함께 일본열도에 분산된 많은 소왕국을 정복하여 하나의 국가로 건설하고 697년 국호를 일본(日本)이라고 하였다. 일본(日本)이란 발음은 백제가 해(日)의 본(本)이 중국대륙과 한반도에서 옮겨졌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왕통(王統)도 변함없이 종전처럼 백제왕가(百濟王家)가 그대로 계승되고 이를 지탱해 주는 상층지배계급도 종전처럼 백제왕족(百濟王族)의 후예(後裔)들로 구성되어 있어 인맥(人脈)이나 계층의 변혁이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왕궁(王宮)이 중국대륙 백제에서 일본열도(日本列島)로 그대로 옮겨 앉기는 했지만 그렇다 해도 백제(百濟)란 국호(國號)를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고 해서 새로운 국호가 필요하여 일본(日本)으로 지은 것이다.

이렇게 백제의 국호가 바뀌고 또한 왕성(王城)의 위치가 옮겨지자 입장은 역전되어 버렸다. 즉 종전에는 바다 건너 일본열도에 있는 나라백제(奈良百濟)는 중국대륙에 있던 백제가 지배하는 속령(屬領)인데 그것으로 본(本)을 옮기고 보니 속령(屬領)이 본토의 입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백제사(百濟史)를 가지고 새로운 일본(日本)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창건된 황국(皇國) 일본(日本)은 신라(新羅)의 침공에 대비하여 대마도(對馬島) - 일기(壹岐) - 방자(堃紫) - 장문(長門) - 찬길(讚吉) - 하내(河內) - 대화(大和)의 해상 루트상에 높은 석성(石城)을 구축하고 군사를 배치하여 신라의 침입에 대비했다. 이때에도 중국대륙과 한반도에 있던 백제유민들이 집단 이주해 오자 일본 왕실에서는 이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지식인은 관리로 등용하기도 하면서 대륙백제의 위상이 일본에서 그대로 갖추어지자 백제 왕족들과 지배계급층은 천지천황(天智天皇)의 장자(長子) 다모(茤毛)를 후계자로 삼아 천무천황(天武天皇)으로 추대했다. 이때 천지천황(의자왕의 아들 부여용)은 65세의 고령(高齡)으로 천황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일본의 제2대 천황으로 추대된 천무천황(天武天皇) 은 즉위식에서 만조백관(滿朝百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국대륙에 있던 우리 백제는 일찍이 선대왕부터 일본열도에 와서 나라백제(那良百濟)를 세웠습니다. 그후 나라백제는 수 많은 왕국들을 정복하면서 영토를 넓혀 명실공히 국가체계를 갖추어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중국대륙에서 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일본열도에까지 대제국 백제 건설을 목표로 선대왕께서 웅대한 포부를 가져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가 중국대륙과 한반도에서 백제의 땅을 모두 잃었지만 다행이 선대왕께서 물려주신 이곳에 와서 다시 새로운 일본(日本)을 건설한 것은 매우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처음 중국대륙에서 백제를 창업하신 온조대왕의 유지를 높이 받들어 두번 다시 나라를 빼앗기는 슬픔과 고통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각료들과 대신들께서도 이 점을 깊이 가슴에 담아두고 어떤 나라의 침략이 있더라고 굳게 나라를 지키고 영원토록 황국(皇國) 일본을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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