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상태바
[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 권우상
  • 승인 2018.11.28 15: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110회

전투가 시작되면서 양쪽 군사들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칼과 칼이 부딪치고 양쪽 진영의 군사들이 격돌하면서 군사들은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일본군 장군들은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적군을 향해 칼을 힘껏 내리쳤다. 군사의 피가 솟구치면서 장수들의 몸을 붉게 물들었다. 피차간 악귀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싸움은 시간이 갈수록 사상자가 속출하면서 소왕국 연합군에 불리했다. 소왕국 연합군의 사상자가 점점 늘어나 더 이상 싸울 군사가 없었다. 많은 희생자를 낸 소왕국 군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제4진에 있던 일본군이 합세하면서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소왕국 연합군은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섭율국왕(攝律國王) 소택손등(小宅孫登)은 전사하고 하내국왕(下內國王) 소산하이(小山下伊)도 큰 부상을 당했고, 대화국왕 귀천보(貴千䀯)와 산성국왕(山城國王) 유전구미(有田久尾)는 일본군 장군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하였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난파(難波)지역에 있는 5개 소왕국을 완전히 정복하여 일본 영토로 복속시켰다.

이 전쟁에서 진소부(秦邵夫)는 많은 적군을 죽였고, 특히 섭율국왕(攝律國王) 소택손등(小宅孫登)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리자 대원진인(大原眞人) 장군은 진소부(秦邵夫)를 부장(部將)으로 임명하여 곁에 두었다. 승전소식을 들은 천무천황(天武天皇 : 백제 의자왕의 손자)은 크게 기뻐하며 전쟁에 참가한 장군들과 군사들을 모아 큰 잔치를 베풀고 격려하였다. 특히 부상당하거나 전사한 병사들의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어려움이 없도록 의복(衣服)과 식량을 무상으로 지원해 주었다.

천무천황(天武天皇) 즉위 5년이었다.

천무천황은 대원진원(大原眞人) 장군에게 군사 2만을 주어 가양국(加良國)을 정벌하라고 지시했다. 가양국은 일본열도에서 일본이 건국된 후 복속을 거부하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왕국으로 혼슈(本州) 북쪽 지역인 육전(陸前), 육중(陸中). 육오(陸奧)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천무천왕은 가양국 압산왕(押山王)에게 사신을 보내어 복속을 요구하였지만 압산왕이 거절하자 그 이듬해(天武天皇 즉위 6년) 대원진인(大原眞人)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2만의 군사를 주어 가양국(加良國)을 치도록 하였다.

가양국(加良國)을 공격하기 위해 일본군이 출정한 때는 12월이었다. 이 흑한기 겨울에 대원진인(大原眞人) 장군은 20만의 군사를 이끌고 가양국을 향해 진군하여 이듬해(天武天皇 즉위 7년) 3월에 날이 풀리자 가양국 접경지역에 도착했다. 이때 가양국(加良國) 조정에서는 일본에 복속하자는 대신들과 복속을 거부하는 대신들로 나누어져 정치질서가 문란해져 있었다. 하지만 압산왕(押山王)은 일본에 복속을 거부하면서 군사를 동원해 항전에 나섰다.

그런데 일본군이 진군하던 도중에 아주 넓은 뻘을 발견하자 더 이상 진군하지 않았다. 뻘 주변에는 강이 흐르고 곧잘 짙은 안개가 끼곤 하였는데 대원진인(大原眞人) 장군은 그것을 이용하여 가양국(加良國)을 무찌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원진인 장군은 뻘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이 가양국의 남쪽인 육전(陸前)을 향해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자 가양국 압산왕은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출전하였다. 압산왕(押山王)은 일본군이 머물고 있는 곳을 확인하고는 곧장 말을 내달렸다. 하지만 그는 일본군의 계략에 말려 들고 말았다. 일본군은 진군하던 도중에 아주 넓은 뻘을 발견하자 더 이상 진군하지 않았다. 뻘 주변에는 강이 흐르고 곧잘 안개가 끼곤 하였는데 대원진인(大原眞人) 장군은 그것을 이용하여 가양군을 무찌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