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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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비화
  • 권우상
  • 승인 2018.11.29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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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회

대원진인(大原眞人) 장군은 뻘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진(陣)을 치고 일부 군사들로 하여금 적(敵)이 관찰할 수 있는 자리에 편안하게 앉아 쉬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군사들을 산속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적의 내습(來襲)을 기다렸다. 맞은 편에 있던 가양군(加良軍)은 일본군이 편안하게 앉아 쉬는 것을 보고 때를 놓치지 않고 기습을 감행하였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던 탓에 가양군은 미처 땅바닥이 진흙 투성이의 뻘이란 사실을 미처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습을 감행한 가양군은 졸지에 진흙 수렁에 갇히고 말았다. 전위부대인 기마병들은 말이 진흙에 빠져 허둥대는 바람에 어쩔줄을 몰랐고, 그들을 지휘하던 압산왕(押山王)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군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사방에서 돌진하였다. 돌격대의 선봉대장은 흑전(潶田)이었다. 흑전(潶田)은 가양국을 정벌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군에 자원한 무사(武士)였다.

키가 9척에다 힘은 장사였고, 창과 칼을 다루는 솜씨가 대단했다. 그리고 그의 칼날은 가양국 압산왕(押山王)의 목을 쳤다. 왕을 잃은 가양군은 한동안 허둥댔지만 곧 대열을 정비하고 맹공(猛攻)으로 일본군을 압박해 왔다. 일본군은 수적으로는 많지만 아주 불리한 상태에 빠졌다.

어느새 일본군은 가양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하지만 가양군은 일본군의 수가 워낙 많아 쉽사리 일본군을 이기지 못했다. 단지 일본군을 둘러싸고 조금씩 포위망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가양군은 일본군의 식량이 고갈되면 스스로 포위망 속으로 뛰어들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가양군의 판단은 적중했다. 시일이 지나면서 일본군의 군량미는 보급로가 차단되어 고갈되었고, 그 때문에 일본군은 굶주림에 허덕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원원진(大原眞人) 장군은 두려움에 떨며 탈출로(脫出路)를 모색했다. 그런 상황에서 며칠이 지났을 때 뜻밖에도 짙은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다. 한치 앞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그 짙은 안개는 8일 동안 계속 끼어 있었고, 대원진인(大原眞人) 장군은 그 안개를 이용하여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일본군은 안개속에서 이른바‘허수아비작전을 썼다. 갈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군영 안팎에 세우고 옆에 병기를 꽂아 두었다. 그런데 그것이 마치 보초를 서고 있는 군사들처럼 보였기 때문에 가양군은 섣불리 쳐들어 오지 못했다. 그때 일본군은 산 옆의 사잇길을 이용하여 밤낮으로 행군하였다. 그리고 육중(陸中: 地名)에 있는 가양군의 왕궁을 공격하여 근위대을 비롯하여 왕족들과 저항하는 대신들을 모조리 참살하고 왕궁을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일본군은 여러 진영으로 나누어 가양군을 공격했다. 갑자기 왕궁을 점령 당하고 왕족들과 대신들은 잃은 가양군은 일본군에 항전했지만 결국 참패하고 말았다. 이 전쟁에서 가양군은 1만의 군사를 모두 잃었고, 왕궁도 불타버렸다. 가양국(加良國)을 정복한 일본은 마침내 일본열도 전역을 하나로 통일하였다.

오늘날의 일본은 배달민족인 백제인(百濟人)이 세운 국가이다. 663년부터 670년까지는 신라(新羅)의 침공에 대비하느라 경황이 없었지만 신라로부터 침공의 위험도 사라지고 중국에 있는 대륙백제와 한반도 있는 백제로부터의 3천여 명의 왕족과 5천여 명의 지배층과 평민을 포함하여 5만여 명의 백제인들이 일본열도에 집단이주하면서 새로운 국가로 창건된 일본은 자주적 독립적인 국가를 경영해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일본국으로 발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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