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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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1.25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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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회

제2부

노비(奴婢) 해방과 공포정치

제5장

왕건(王建)은 재위 4년(921년)에 제2비(妃) 장화왕후 오(吳)씨 소생인 무(武)를 정윤(正胤 : 왕위를 이을 사람으로 태자)에 책봉할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적지 않았다. 조정 대신들 중에서도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누어 의견이 분분하였다.

특히 지방 호족들의 반대가 심했다. 반대하는 이유는 무(武)의 어머니 오(吳)씨가 한미(寒微)한 가문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건(王建)은 당연히 장남으로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놓고 왕건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차에 제3비(妃) 신명순성왕후 유(柳)씨가 태자 태(泰)를 출산하자 왕건(王建)은 세자 책봉을 놓고 더욱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호족들은 무(武)를 태자로 책봉해서는 안된다고 연일 상소를 올리고 있었다.

- 무(武) 왕자로 하여금 태자로 책봉하시는 것은 불가하옵니다. 큰 혼란이 일어나기 전에 폐하의 뜻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만일 거두어 주시지 않으셨다가 무슨 변고라도 일어난다면 이 모든 것은 폐하의 책임이옵니다 -

마치 협박과 비슷한 내용의 상소(上訴)가 왕건의 앞에 연일 쌓이고 있었다. 지방 곳곳에서 올라 온 호족(豪族)들의 상소였다.

이렇게 되자 왕건(王建)은 세자 책봉 문제를 놓고 호족들의 눈치를 살피며 차일피일 미루어 왔지만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왕위 계승권을 놓고 두 호족들간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건저(建儲 : 세자를 세우는 일) 문제로 고민하던 왕건은 장자를 태자로 세우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 일로 실망할 장화왕후 오(吳)씨를 위로하기 위해 낡은 상자에 자항포(柘黃袍 : 왕이 입는 옷)를 넣어서 측근 신하를 시켜 장화왕후에게 전하게 했다. 비록 장자를 왕으로 세우지 못하지만 자신의 마음은 장자를 왕으로 세우고 싶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자황포(柘黃袍)를 받은 장화왕후 오(吳)씨는 대광(재상) 박술희를 은밀히 불렀다.

“왕후마마! 소신을 불러사옵니까 ?”

하고 박술희가 방에 들어서자 장화왕후는

“박 대광(재상)과 나눌 말이 있어서 불렀습니다. 가까이 다가 와 앉으세요”

“예”

대답을 하고 박술희는 장화왕후 앞에 가까이 다가 앉았다. 장화왕후는 자황포를 보이며

“폐하께서 이걸 보내셨습니다”

“자황포가 아닙니까 ?”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무슨 이유로 이 자황포를 보내셨는지 몰라 박 대광을 불렀습니다”

박술희는 자황포를 보고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소신의 생각으로는 폐하의 뜻을 왕후마마에게 전할려고 보낸 것 같사옵니다”

하였다.

박술희는 후백제 궁예의 휘하 근위병 출신으로 강직하고 사심이 없는 성격이었다. 왕건(王建)이 장화왕후로 하여금 박술희에게 자황포(柘黃袍)를 보이게 한 것은 박술희의 힘을 빌리려는 하나의 계책이었다.

“왕후마마 ! 폐하의 뜻을 알겠사옵니다”

“폐하의 뜻이 어떠합니까 ?”

“폐하께서는 장자(長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시는 것이옵니다 !”

“그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하옵니다만 호족들의 반대가 워낙 심하니 폐하께서 쉽게 용단을 내리시지 못하는 것 같사옵니다. 참으로 딱하옵니다.... 하오나 심려 마시옵소서. 비록 호족들이 반대한다 해도 폐하의 뜻이 그러시다면 무(武) 왕자님을 태자로 책봉할 것이옵니다”

“박 대광(재상)께서 힘써 주세요”

“예. 내일 아침 입궐해서 폐하께 단호하게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태자 책봉 문제는 더 이상 미룰수 없는 일이옵니다”

이튿날 박술희는 어전에서 왕건(王建)에게 왕자 무(武)를 태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다.

“폐하! 더 이상 망설이지 마시고 용단을 내리시옵소서. 무(武) 왕자님을 태자로 책봉하시옵소서......”

“짐의 생각도 무(武)를 태자로 삼고 싶은데 호족들이 반대하니 마음이 편치 않소이다”

“폐하 ! 구더기 무서워 장을 담그지 못하겠사옵니까. 장자이신 무(武) 왕자님을 태자로 책봉하시옵소서 !”

“그렇게 할터이니 박 대광(재상)이 우리 무(武)를 잘 보필해 주시오”

“예. 폐하!”

박술희의 주장대로 왕건(王建)은 장화왕후 소생인 무(武)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러자 지방 호족(豪族)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이들은 충주 유(劉)씨 가문의 세력들이었다. 신명순성왕후의 친정인 충주 유(劉)씨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왕건이 궁예를 몰아낼 때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왕건(王建)은 등극하자마자 충주 유(劉)씨 가문의 유한설을 순군낭중에 임명하고 충주 유(劉)씨와 혼인관계를 맺어 신명순성왕후를 세 번째 왕비로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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