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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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1.28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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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회

유한설이 맡고 있던 정2품의 순군낭중은 각 호족들의 병권(兵權)을 관장할 수 있어 충주 관료로 실질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막강한 자리였다. 이런 지위를 왕건이 즉위할 때 충주 유(劉)씨에게 주었다는 것은 그 만큼 왕건이 그들 집안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충주 유(劉)씨는 박수경으로 대표되는 평산 박씨의 세력과도 돈독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세력은 막강했다.

이에 비해 장화왕후 소생인 왕자 무(武)의 외가인 나주 오(吳)씨의 세력은 미미했다. 오씨와 유대를 맺고 있는 주변 세력도 없었다. 이 때문에 왕건(王建)은 태자 무(武)의 앞날이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각하면 이 일로 한 차례와 왕권을 둘러싼 피바람이 불어닥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왕건(王建)은 태자(武)의 앞날을 위해서 여러 가지 안배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태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왕건은 먼저 대광(재상) 박술희를 후견인(後見人)으로 선정하고 진천 김(金)씨 집안에서 태자 빈(嬪)을 맞아 들였다.

또한 경기 지역에서 막강한 힘을 형성하고 있던 왕규의 딸을 태자(武)의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이는 한편 청주, 김긍률의 딸을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여 이중 삼중으로 태자(武)를 둘러싼 세력을 키워 충주 유(劉)씨의 세력을 견제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태자(武)를 보위하는 세력과 충주 유(劉)씨 세력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왕건(王建)이 살아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왕건이 오늘이라도 죽는다면 충주 유(劉)씨 세력은 곧바로 반기(反旗)를 들고 일어나 지금의 태자(武)를 쳐 내고 신명순성왕후 유(劉)씨 소생 왕자를 태자로 옹립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신명순성왕후 유(劉)씨 소생으로 태(泰), 요(堯), 소(昭)를 비롯한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러한 왕자들을 두고 장화왕후 소생인 무(武)가 태자로 책봉된 것이 충주 유(劉)씨 세력들은 불만이었다.

그래서 태자(武)를 둘러싼 세력에 맞설 만한 힘을 키우기 위해 충주 유(劉)씨 세력들은 주변 호족(豪族)들을 포섭하는 등 더욱 힘을 키우는데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심지어는 사병(私兵)까지 양성하면서 왕건(王建)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건(王建)은 즉위 직후 북진정책을 감행하기 위해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삼고 그곳으로 많은 사람들을 이주(移住)시켰다. 당시 평양에는 여진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왕건은 군대를 보내어 여진족을 몰아내고 북진정책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왕건(王建)은 비록 개경에 궁성을 건설했지만 평양을 소흘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평양이 변방인 점을 감안하여 많은 병력을 배치하였으며 왕건은 몸소 평양을 시찰하여 919년 10월에는 평양성 복원을 완료했다.

그러자 서경(西京)은 개경(開京)과 더불어 고려(高麗)의 가장 주요한 지역으로 떠 올랐고 자연스럽게 서경을 중심으로 일단의 세력이 형성되었다. 이들 서경파 세력의 중심에는 과평 시랑 열평(평산 박씨)과 왕식렴 세력이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왕식렴(王植廉)은 왕건(王建)의 사촌 동생이었다. 이들이 서경(西京)의 중추적 세력으로 부상함에 따라 이들과 돈독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충주 유(劉)씨의 힘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곳곳에 사병(私兵)을 양성하는 훈련장이 야산에 은밀히 설치되어 왕건이 죽은 후 곧 바로 태자(武)를 옹호하는 세력을 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는데 열중했다.

이러한 충주 유(劉)씨 세력의 음모(陰謀)를 어느 정도 파악한 왕건(王建)은 이들과 맞설 수 있는 세력을 태자(武)에게 실어주기 위해 박술희를 후견인으로 선정하고 진천 임씨 집안에서 태자빈을 맞아 들였다.

또한 경기 지역에서 막강한 힘을 형성하고 있던 왕규의 딸을 태자(武)의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이는 한편 청주 김긍률의 딸을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여 충주 유(劉)씨의 세력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왕건(王建)의 이 같은 노력으로 태자(武)를 보위하는 개경파와 태자(武)를 밀어낼려고 하는 충주 유(劉)씨 세력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그래서 충주 유(劉)씨 세력은 감히 태자(武)를 밀어내는 반란을 획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신명순성왕후 소생 왕자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토록 하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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