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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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1.31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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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회

그리고는 조용히 눈을 감고 숨을 거두었다. 이 때가 943년 왕건의 나이 67세였다. 태조(왕건)가 죽자 태자(武)가 제2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이 분이 혜종(惠宗)이다.

혜종(惠宗)은 태조(왕건)와 장화왕후 오(吳)씨의 장남으로 912년 나주에서 출생하였다. 이름은 무(武)이고 자(字)는 승건(承乾)이다. 태조(왕건)의 제1비(妃) 신혜왕후 유(柳)씨가 소생이 없었던 탓으로 아들을 보지 못했던 왕건은 나주의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오씨로부터 첫아이를 얻었으니 그가 바로 혜종(惠宗)이다.

궁예의 신하로 있던 시절 왕건은 나주를 점령하고 그곳에서 오(吳)씨를 만났다. 이 때 왕건은 비록 동침은 했지만 그녀의 출신이 미천한 것을 염려하여 임신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정액을 돗자리에 배설하였는데 오(吳)씨가 이 정액(精液)을 제빨리 거두어 질속으로 흡수하였다. 그리고 열 달 후 아이를 낳았는데 이상하게도 아이의 이마에 돗자리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혜종(惠宗)의 얼굴에는 유난히 돗자리 무늬와 같은 주름살이 많아 ‘주름살 임금’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주름살 임금’이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 혜종은 2년 4개월간의 재위 기간동안 내내 얼굴에 주름살 펼 날이 없는 위태롭고 긴장된 나날을 보냈다.

태조(왕건)가 죽자 혜종의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고 있던 충주 유(柳)씨 세력과 왕요(王堯), 등의 신명순성왕후 소생들이 본격적인 권력 쟁탈 작업에 들어갔다. 그동안 양성해 온 사병(私兵)까지 동원하여 혜종(惠宗)을 보위하는 근위병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태도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혜종은 늘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호위하는 병사를 거느리고 다녔다.

더구나 왕요(王堯)와 왕소(王昭)는 서경(西京)의 핵심 인물인 왕식렴 등과 힘을 합치고 박술희와 왕규에게만 의존하는 혜종의 태도를 못마땅하던 청주 유력가 김긍률을 끌어 들이는데 성공했다.

또한 견훤의 사위이자 왕요(王堯)의 장인 박영규와 박수경, 박수문 형제도 이들에 동조함에 따라 왕권(王權)은 점점 위축되어 혜종은 불안에 떨며 침실을 옮겨가며 잠을 자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왕규는 이러한 현실을 분통해 하며 혜종에게 왕요(王堯) 형제가 역모를 도모하고 있다고 고변하고 역모 세력을 엄단할 것을 촉구했다.

“폐하 ! 역모에 가담한 왕요 형제를 엄히 다스리시옵소서”

왕규의 말에 혜종은

“그렇게 하면 더 큰 불란이 일으날 것이오. 차라리 내 딸을 왕소에게 주어 끈끈한 인연을 맺는 것이 좋을 듯 하오”

하였다.

혜종(惠宗)은 오히려 자신의 맏딸을 왕소(王昭)의 두 번째 부인으로 내주면서 화해 의사를 타진했다. 비록 왕규와 박술희의 보좌를 받고 있긴 했지만 혜종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빈약했고 따라서 혜종은 왕요(王堯), 왕소(王昭) 형제와 화친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혜종(惠宗)의 화해 손짓에도 불구하고 왕요(王堯) 일파의 왕권 위협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혜종을 옹위하는 개경파와 혜종의 왕위를 거부하는 서경파의 대립은 날로 심해지고 이 틈바구니 속에서 가까스로 왕위를 유지하고 있던 혜종(惠宗)은 설상가상으로 병마에 시달리게 되었다.

혜종이 병상에 눕자 자연스럽게 개경파의 힘은 약화되고 이 때문에 개경파를 지원하던 청주 김씨 등의 중립 세력이 서경파(西京派)에 합세 하였다.

중립 세력을 흡수한 서경파는 마침내 개경파(開京派)의 거두 박술희를 역적으로 몰아 귀양 보냈다. 그리고 얼마후 자객을 보내어 죽였다. 박술희가 살해 당하자 왕규를 중심으로 한 개경파는 총력전에 돌입하였지만 이미 힘이 약화된 탓에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던 차에 혜종(惠宗)은 병이 점점 악화 되어 정사(政事)를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혜종의 병이 깊어지자 왕요(王堯)는 혜종을 살해할 결심으로 혜종의 침실에 복면을 한 자객을 보내 살해할 것을 측근에게 지시하자 자객(刺客)은 야간에 몰래 혜종의 침실에 들어가 혜종의 가슴을 칼로 찔러 살해했다. 혜종(惠宗)은 34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 때가 945년 9월이었다.

혜종(惠宗)은 의화왕후 임씨를 비롯 주원부인 왕씨, 청주원부인 김씨, 궁인 애이주 등 4명의 부인에게서 2남 3녀를 얻었다. 의화왕후 임씨는 대광(大匡 : 재상) 임희의 딸로 921년 12월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태자 무(武)와 혼인하였으며 943년 5월 혜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후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는 흥화군, 경화궁부인 진헌 공주 등이 있다.

후광주원부인 왕씨는 대광(大匡 : 재상) 벼슬의 왕규의 딸이며 청주원부인 김씨는 원보(벼슬) 김긍률의 딸로 궁두 사람 모두 소생이 없다. 궁인(宮人) 애이주는 경주 사람이며 대간(벼슬) 연예의 딸이다. 소생으로는 태자 제(啼)와 명혜부인이 있다.

혜종(惠宗)이 죽자 왕식렴의 서경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충주 유(劉)씨 세력의 사병(私兵)이 합세하여 개경파를 공격하였다. 왕식렴의 군대가 야음을 틈타 개경으로 진주했을 때는 이미 혜종은 살해당한 이후였고 궁성이 왕요(王堯) 세력에 의해 완전히 포위된 채 장악 당해 있었다.

그리고 왕식렴의 서경(西京) 군대는 왕요 일파의 왕위 계승에 반발하는 왕규(大匡 : 재상)와 300여 명의 문무대신들을 역적으로 몰아 무차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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