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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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2.01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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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회

이 때 사저(私邸)에 머물고 있던 장군 거타지(居他之)와 연추(淵酋)는 왕건이 죽은 후 호족 세력들의 반란을 우려하다가 왕식렴의 서경 군대가 반란을 일으키기 사흘 전에 반란의 징후를 예감하고 야음(夜陰)을 틈타 말(馬)을 타고 북쪽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압록강을 건너 거란(契丹)으로 들어 갔다. 하지만 혜종을 지지한 술사(術士) 최지몽(崔智夢)은 반란군에 잡혀 서해(西海)의 섬으로 귀양을 갔다.

혜종(惠宗)을 호위하는 왕규의 군사들은 끝까지 대항하여 싸웠지만 힘이 부족하여 쉽게 무너져 제압 당했다. 그러자 서경파는 개경파의 거두인 박술희와 왕규를 귀양보내고 권력을 잡는데 성공했다. 박술희는 혜종의 무력적 기반이었기 때문에 왕요(王堯) 일파에겐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왕요(王堯)가 박술희와 왕규를 제일 먼저 죽인 것은 혜종의 무력적 기반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왕요(王堯)는 개경파를 완전히 제거한 후 서경파에 의한 추대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이 분이 바로 제3대 왕 정종(定宗)이다.

왕건(王建)이 죽은 943년 당시 왕요(王堯)의 나이는 21세였다. 왕요가 본격적으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고 나서자 왕실에서도 왕요를 믿기 시작했다. 왕실측은 왕요가 집권하는 것이 조정을 가장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정종(定宗)은 즉위초부터 개경파 세력과 백성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이 때문에 정종은 개경(開京)을 폐쇄하고 서경(西京)으로 천도하기 위해 많은 인력을 강제로 동원하여 평양에 궁성을 쌓기 시작했다.

하지만 천도 계획은 무리하게 노동력을 착취하여 오히려 민심을 이반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정종(定宗)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 주었다.

정종(定宗)은 신명순성왕후 유(劉)씨 소생으로 이름은 요(堯)이며 자(字)는 천의(天義)이다. 923년에 태어난 정종은 신명순성왕후의 두 번째 소생이며 태조(왕건)의 셋째 아들이다. 하지만 신명순성왕후의 첫 번째 소생인 태(泰)가 어린 나이로 죽자 차자(次子)가 그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태조(왕건)의 차남이었지만 그는 장남 혜종 보다는 지지기반이 튼튼하였다. 강력한 호족 세력인 충주 유(劉)씨가 그의 외가였기 때문이었다. 지지기반이 튼튼한 덕분에 그는 왕규에 의해 역모자로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혜종이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945년 9월 측근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정종(定宗)은 강인하고 고집스러운 성품이며서 한편으로는 불심(佛心)이 깊고 고구려 고토(古土)를 회복하겠다는 신념이 강했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서경(평양) 천도를 서둘렀다. 개국초기부터 피를 너무 많이 흘려 개성의 지기(地氣)가 나빠졌고, 고구려의 고토(古土) 회복을 위해서라도 서경(西京)이 유리하다는 것이 천도의 명분이었다.

그러자 신하 유흥준(劉興俊)은 서경 천도를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폐하 ! 도참을 그릇되게 믿으시고 왕성을 옮기심은 아니되옵니다. 폐하께서 서경으로 천도하시겠다는 뜻을 소신이 모르는바 아니오나 백성들을 무리하게 동원하여 공사를 일으켜 많은 백성들을 고생시킨다면 비록 폐하의 마음으로는 옳다고 하는 일도 백성들의 마음은 동조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만일에 백성들의 원성이 일어난다면 민심이 등을 돌리게 되오니 서경으로 천도를 하시겠다는 계획을 취소하심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그건 아니되오. 서경 천도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강행할 것이니 더 이상 이 일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말기를 바라오 !”

정종(定宗)의 서경 천도계획은 확고했다. 하지만 궁성을 옮기려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즉위 과정에서 개경파와 지나치게 대립한 나머지 무력으로 유혈(流血) 투쟁을 한데다가 즉위 이후에서는 개경 세력을 거의 모두 제거해 버렸기 때문에 개경(開京) 백성들의 민심이 정종으로부터 등을 돌린 것이 천도계획의 본질적인 이유였다.

서경(徐京) 천도 계획과 더불어 정종(定宗)은 거란군(契丹軍)의 침략을 대비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광군(光軍) 30만을 조직하였다. 정종이 광군 30만을 조직하겠다고 마음 먹게 된 동기는 최광윤의 거란 침략에 관한 보고 때문이었다.

최광윤은 후진(後秦)에 유학을 갔다가 거란(契丹)의 군사들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그곳에서 재주를 인정받아 벼슬을 하고 있던 중 거란의 사신으로 고려(高麗)에 오게 되었다. 이 때 최광윤은 거란(契丹)이 고려(高麗)를 침략할 것이라는 사실을 전해 주었다.

그런데 최광윤이 거란의 포로가 되었을 때 최광윤을 직접 심문한 고려인 장수가 있었다. 이 장수가 바로 거타지(居他之)와 연추(淵酋)였다. 거타지와 연추는 혜종(惠宗)을 지지하고 있던 인물이었는데 이들은 혜종을 축출하고자 할려는 호족세력의 반란을 예감하고 거란으로 도주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뛰어난 무예를 인정 받아 거란(契丹)군의 장수가 되었다.

최광윤이 거란에서 벼슬을 하게 된 것도 거타지(居他之)의 천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타지(居他之)는 거란군 궁술대 수장(首長)을 맡고 있었으며 연추(淵酋)는 창검술의 교관으로 있었다. 이 때 이들은 나이가 일흔이 넘은 노장(老將)이었다.

최광윤이 거란의 사신으로 고려에 오면서 거타지와 연추가 거란에 있다는 사실을 고려 조정에 알려 줌으로써 고려의 두 장수 거타지(居他之)와 연추(淵酋)가 거란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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