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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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2.07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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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회

광군(光軍)은 호족 연합체였다. 30만 대군으로 거란군과 맞서 싸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광군(光軍)의 지휘관에는 무예가 출중한 호족(豪族)들을 임명하고 한달동안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군량미까지 확보해 두었다.

당시 중앙정부는 30만 군대를 먹이고 입히면서 관리할 능력이 없었을뿐 아니라 정규군으로 이렇게 많은 병력을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정종(定宗)은 무리하게 30만이란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였다.

정종(定宗)의 이러한 군사력 확보는 자신이 왕권을 탈취해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자신에게 도전하는 세력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였다. 즉 막강한 군사력으로 왕권을 강화하여 반란 세력을 궤멸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호족들을 광군(光軍)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광군사(光軍司)’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광군(光軍)들을 중앙에서 직접 통제하는 체제를 유지했다.

그러나 정종(定宗)의 이러한 계획은 거란군의 침략이 없자 흐지부지된 채 결실을 보지 못했다. 정종은 겉으로는 강한 척 하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백성들의 민심이 등을 돌릴까바 마음을 졸였고 또 한편으로는 즉위 과정에서 개경파의 사람들을 너무 많이 죽인 것에 대해 죄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정종은 고려(高麗) 최고의 명궁(名弓)인 거타지(居他之)와 창술의 일인자인 연추(淵酋)가 거란군의 장군이 된 것을 몹시 아쉬워 하였다. 그래서 정종은 거타지와 연추를 다시 고려로 돌아 오도록 하라고 신하들에게 명령을 하였고 명령을 받은 윤강(尹崗)은 왕의 뜻을 거타지에게 전달했으나 거타지(居他之)는

“나는 이미 늙어 다시 고려로 돌아간들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어 이곳에서 조용히 여생을 지내고자 하오”

하면서 고려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또한 정종(定宗)은 귀양살이 하고 있는 최지몽을 불러 들이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을 죽인 죄를 씻기 위해 손수 불사리를 받들고 십 리나 되는 길을 걸어서 개국사에 봉안하고 곡식 7만 석을 풀어 각 사찰에 전달하기도 했다.

죄책감이 원인이 되어 ‘불명경보’와 ‘광학보’를 설치하여 불교를 장려하고 승려를 양성하는 ‘승양보’을 설치하는 등 불교진흥책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정종(定宗)은 죄책감을 이기지 못했다. 더구나 죽은 영혼들이 꿈에 나타나 목에 칼을 겨누고 창을 겨누면서

“나를 죽였으니 너도 죽어야 할 것이다 !”

하면서 위협하여 잠을 자다가 놀란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일이 계속되다 보니 정종(定宗)은 자다가 깜짝깜짝 놀라 경기가 들었다. 948년 9월에 동여진의 대광 소무개 등이 말 7백 필과 토산물을 바쳤다. 이 때 정종이 손수 물건들을 검열하다가 갑작스럽게 몰아친 우레와 천둥소리에 놀라 잠시동안 의식을 잃었다.

이러한 일로 정종(定宗)은 병상에 눕게 되었고 병은 점점 깊어졌다.

그러자 서경(西京) 천도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은 머지많아 부역에서 헤어날 수 있다고 좋아하였으며 이 같은 민심을 전해들은 정종(定宗)은 점점 더 기력을 잃고 깊은 병마속에 빠져 들었다. 949년 1월 병상에서 정종은 왕식렴의 소망소식을 듣고 슬프하며 울었다.

그리고 정종(定宗)은 두 달 후인 3월에 병이 더욱 위독하여 동복 아우 왕소(王昭)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생을 마감했다. 정종(定宗)은 눈을 감으면서 장수 거타지(居他之)와 연추(淵酋)가 거란으로 망명한 것을 못내 아쉬워 하였다.

이 때 그의 재위 연수는 4년이요, 향수는 27세였다. 그가 죽자 서경(西京) 천도 계획은 취소되었고 궁성 건립의 공사도 중단되었다. 백성들은 정종의 죽음에는 슬프하였지만 부역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좋아하며

“ 만세 ! 만세 !”

하면서 환호했다.

부역에 동원된 백성들은 풀려나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종(定宗)은 문공왕후 박씨, 문성왕후 박씨, 청주남원부인 김씨 등 3명의 부인을 두었고 문성왕후 박씨에게서 경춘원군과 공주 1명을 얻었다. 문공왕후와 문성왕후는 친자매로 후백제 견훤(甄萱)의 사위 박영규의 딸이다. 또한 이들은 태조(왕건)의 제17비(妃) 동산원부인 박씨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이러한 삼중 결혼은 고려(高麗) 왕실에서도 아주 드문 경우에 해당하는데 태조(왕건)의 후백제 호족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이는 후백제 세력을 달래는 데 박영규의 영향력이 지대했기 때문이었다.

청주 남원부인 김씨는 원보(벼슬) 김긍률의 딸이며 혜종의 제3비 청주원부인 김씨의 친동생이다. 청주 호족 김긍률은 당시 충주 유(劉)씨와 더불어 유력한 호족 중의 하나였는데 원래는 태조(왕건) 생존시 혜종(惠宗)에게 딸을 시집 보냄으로써 혜종의 세력이 되었다.

하지만 힘의 균형이 깨지고 서경파와 왕요(王堯)에게 힘이 집중되자 정종(定宗)에게도 둘 째 딸을 후궁으로 보냈다. 말하자면 청주 남원부인 김씨는 김긍률의 호신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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