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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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2.12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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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회

이러한 광종(光宗)의 개혁정치로 인해 해방된 노비(奴婢)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광종대왕 만세 !”

“광종대왕 만세 !”

하면서 기뻐하였다.

고려(高麗) 건국의 핵심 세력인 지방 호족들은 전쟁에서 세운 공이나 건국에 힘을 보탠 공로로 많은 노비(奴婢)를 거느렸다. 더구나 인물이 반반한 젊은 여자의 노비는 성폭력이나 성추행 등을 자행하면서 마치 노리개감처럼 취급을 당했다.

남자 노비들은 대부분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사람들이거나 채무자나 극빈자들이었고, 여자의 경우 남편이 채무나 생활고 때문에 돈을 받고 노비로 전락되면서 함께 노비(奴婢)가 된 경우도 있었다.

호족(豪族)들은 노비(奴婢)들을 농사(農事)나 가사(家事)에 동원하였으며 때로는 사병(私兵)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특히 왕실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던 대호족들은 천 명이 넘는 많은 사노비(私奴婢)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정부(왕권)를 위협하는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노비(奴婢)는 병력의 의무도 없었던 까닭에 노비의 증가는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광종(光宗)이 노비를 없애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노비(私奴婢)의 숫자를 늘이기 위하여 장정 노비와 양인(良人) 여자의 결혼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는 양천교혼(良賤交婚 : 양인과 천민이 혼인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만약 이런 일이 발생했을 경우 그 자녀들은 노비(奴婢)로 전락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남자 노비(奴婢)와 양인(良人) 여자를 결혼시키면 노비의 숫자는 늘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이용하여 호족들은 고의적으로 양천교혼(良賤交婚 : 양인 여자와 천민 남자가 혼인하는 것)을 강요하여 노비의 수를 늘렸고, 만일 양인 여자가 천민 노비와 결혼을 반대하면 쥐소 새도 모르게 죽여 없애는 일도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었다.

노비(奴婢)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양인(良人)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말하며 이는 곧 국방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노비(奴婢)는 호족들이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무력적 기반이었기 때문에 사노비(私奴婢)의 증가는 반란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왕권을 강화시키고 중앙집권적 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던 광종(光宗)에게는 사노비(私奴婢)의 수를 줄이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이 공포되자 고려의 통일 전쟁으로 포로가 되어 양인에서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이 모두 양인으로 회복되었다. 노비(奴婢)에서 해방(解放)된 사람들은 광종(光宗)에게 열렬한 환영과 찬사를 보냈다. 노비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간단했다.

노비(奴婢) 스스로가 자신이 과거에 양인(良人) 신분이었다는 것을 관청에 신고하기만 하면 곧 바로 양인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렇듯 양인(良人)으로 회복하는 길이 간단하였던 만큼 삼국시대부터 노비(奴婢)로 살아 온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노비에서 해방되어 양인이 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수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던 대호족(大豪族)들은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인력을 빼앗겨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호족들이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반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공신전(功臣田)을 경작하는 대가로 노비로부터 받던 세금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고 사병(私兵)의 수도 격감되었다. 호족들의 입지가 약해진 반면 국가는 세금이 늘어나고 병졸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결과적으로 왕권(王權)이 신장되어 중앙집권적 체제 확립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물론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의 시행이 가져 온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자손 대대로 내려오던 종(奴婢)들이 집단으로 들고 일어나 난동을 부리는가 하면 노비로 있던 사람이 자신의 옛주인을 헐뜯고 욕하는 일로 싸움이 벌어지는 사건도 잇따라 터졌고, 노비(奴婢)와 양인(良人) 계층의 이반으로 신분 질서가 문란해져 사회적 토대가 흔들리는 양상도 일부 발생했다.

이런 무질서한 사회의 혼란을 막기 위해 광종(光宗)은 순회재판(巡廻裁判) 제도를 실시하여 뇌물이나 권력으로 부당하게 재판에서 승소하는 폐단을 막아 공정한 재판을 하도록 하였다. 이 순회재판제도(巡廻裁判制度)는 많은 백성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다.

또한 광종(光宗)의 근위대(近衛隊)가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에 항의하여 난동을 부리는 호족 세력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력 충돌로 인해 정계의 대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경제기반인 노비(奴婢)의 상당수를 잃게 되자 각 지방에서 호족들이 뭉쳐 매일 거세게 반발하면서 격렬하게 난동을 부렸다.

하지만 그 때마다 광종(光宗)은 근위대(近衛隊)를 동원하여 난동을 무력으로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일부 노비(奴婢)들이 근위대의 편에 서서 몽둥이나 죽창(竹槍)을 들고 호족들과 싸움을 벌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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