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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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2.13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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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회

이 때가 956년(광종7년)이었다. ‘노비안검법’은 노비들의 실태를 파악하여 부당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은 해방시키는 일종의 ‘노비해방법(奴婢解放法)’이었다.

또한 노비해방(奴婢解放)은 호족들의 경제적 무력적 기반이 사라진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호족들이 거세게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는 광종(光宗)의 비(妃) 대목왕후까지도 이 일에 나서면서 이렇게 말했다.

“폐하 ! 노비안검법을 실시 하오시면 아니되옵니다. 호족들이 그토록 반대를 하고 있으니 어찌 감당을 하시겠사옵니까. 하오니 노비안검법을 철폐하여 주시옵소서 !”

그러자 광종(光宗)은 분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철폐라니 당치도 않소. 철폐할 것이라면 처음부터 실시하지 않았을 것이오. 원래 개혁에는 반대 세력이 있기 마련이오. 썩은 나무를 잘라 내지 않고는 새로운 나뭇가지를 키울 수가 없소이다. 그러니 왕후는 이 일에 더 이상 관여하지 마시오.. 분명히 말해두지만 만일 호족들이 끝까지 반대 난동을 부린다면 반역으로 모조리 참수할 것이오....”

이처럼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실시하고자 하는 광종(光宗)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래서 대목왕후도 더 이상 간언하지 않았고, 왕족 누구도 입밖으로 반대 주장을 하지 않았다.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실시로 호족들의 힘이 약화되고 상대적으로 왕권이 강화되자 광종은 또 다시 958년 ‘과거제’ 도입이라는 폭탄 선언을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으로 전국이 시끌법적한 터에 ‘과거제(科擧制)’까지 실시한다고 선언하자 전국은 마치 변란(變亂)이라도 일어난 듯 희비(喜悲)가 엇갈린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과거제’ 도입은 호족들이 중심이 된 공신 세력에게 크나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야말로 호족들에게는 ‘노비안검법’에 이어 또 하나의 폭탄을 터뜨린 셈이었다.

호족들은 고려(高麗) 건국과 통일 과정에서 전공을 세웠거나 무력을 제공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무인(武人)들이 대다수였다. 때문에 학문을 기반으로 하는 ‘과거제’ 실시는 호족의 자네들의 정계 진출을 제도적으로 막는 장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공부를 하지 않은 무식한 사람은 정계(政界)에 나올 수 없다는 뜻이었다.

‘과거제’는 쌍기의 건의로 이뤄졌는데 쌍기는 후주(後周)의 태조 치하에서 절도순관, 장사랑, 시(試)대리평사 등을 지냈다. 시(試)대리 평사는 시험을 주관하는 관리이기 때문에 쌍기는 과거제도에 관한 지식이 많은 인물이었다.

특히 후주(後周)는 건국한 지 얼마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고려(高麗)가 처해 있는 입장과 비슷한 면이 많았다. 후주(後周)의 태조는 제후국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당(唐)나라 제도를 모범으로 과거제를 실시했고 그 결과 왕권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쌍기는 그 개혁 과정에서 과거(科擧)에 관한 실무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당시 책봉사는 장작감 설문우였고, 쌍기는 그를 따라 함께 고려에 왔다. 쌍기가 설문우를 따라 온 경위는 광종(光宗) 쪽에서 초청했기 때문이었다. 955년에 대상(재상) 왕륭이 주(周)나라를 다녀 온 적이 있는데 광종은 이 때 측근 신하를 통해 주(周)나라의 인재를 초빙하라는 밀명(密命)을 내렸다.

왕륭 역시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광종(光宗)의 이러한 요구를 쉽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고려(高麗)에 당도한 쌍기는 얼마후 병에 걸려 사신(使臣) 일행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것은 이미 광종(光宗)의 밀명(密命)을 받은 측근 신하와 짜고 계획된 일이었다. 말하자면 와병(臥病)을 핑계하여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사신 일행이 돌아간 다음에 광종(光宗)과 대면하여 고려로 귀화(歸化)를 한다는 속셈이었다. 책봉사 일행이 돌아간 뒤에 쌍기는 병상에서 일어났고 드디어 광종(光宗)과 대면하였다.

내전(內殿)에서 은밀히 쌍기를 만난 광종(光宗)은 그의 개혁적인 성향과 뛰어난 식견에 감탄하여 후주(後周)의 왕 세종에게 국서를 보내 쌍기를 고려의 신하로 삼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여 승낙을 받자 광종(光宗)은 쌍기를 원보 벼슬에 임명했다. 이 때문에 호족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광종(光宗)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광종(光宗)은 오히려 쌍기를 다시 한림학사로 승진시켜 학문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도록 했다. 그리고 958년(광종 9년) 마침내 쌍기를 지공거(知貢擧) : 관리를 주관하는 관직)로 임명하고 시(詩), 부(賦), 송(頌), 책(策)으로써 진사 갑과(甲科)에 2명, 명경과에 3명, 복업(卜業)과에 2명을 선발하였다.

이것이 한민족 역사상 가장 최초로 실시한 과거시험이었으며 최초로 진사 갑과(甲科)에 합격한 사람은 최섬 외 1인이었다.

이 때 실시한 과거(科擧)는 당(唐)나라 제도를 모범으로 한 것이다. 과거에는 문과에 제술(製述) : 글을 짓는 것)과 명경(明經 : 유학 경전에 대한 지식을 측정하는 것)이 있었고, 그 외에 잡과로 의복(醫卜 : 의학과 역학) 지리(음양 풍수설) 율학, 서학, 산학, 삼례(三禮 : 주례. 의례, 예기를 시험과목으로 하는 것), 삼전(三傳 : 춘추의 주해서인 좌전, 공양전, 곡량전을 시함과목으로 하는 것) 하론(何論 : 제목으로 글을 짓는 일종의 논술) 등이 있었다.

과거(過擧)에 응시하는 사람 중 이 과목에서 등위(等位)에 든 사람에게 출신(出身 : 벼슬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처음으로 과거(科擧)가 실시된지 2년 뒤인 960년에 시(詩), 부(賦), 송(訟)만 가지고 다시 시험을 쳤고, 964년에 또 시(詩), 부(賦), 송(訟) 및 시무책을 가지고 시험을 쳤다. 이 때 특이한 것은 시무책을 삽입한 점인데 이는 하론(何論 : 논술)의 한 형태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기술하는 문제였다.

이처럼 시무책을 시험과목으로 채택한 것은 개혁에 걸맞는 인사에 대한 광종(光宗)의 강한 열망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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