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상태바
[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2.14 13: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50회

이후 966년, 972년 973년에도 과거(科擧)를 통해 인재를 뽑았다. 광종은 과거제를 통하여 전국에 학교가 세위지고 학풍이 일어나 문치적 관료 체제가 갖춰지길 원했는데 계속된 과거(過擧)시험으로 전국에 이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어 광종(光宗)의 뜻대로 전국 곳곳에 학교(서당)가 세워져 학문을 하는 선비가 늘어났다.

그리고 충(忠)과 효(孝)를 최고의 행동 윤리로 생각하는 유교적 관료들이 조정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효자, 열녀등 미풍양속을 간직시키기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 이러한 품행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이 나왔다.

전라도 구례에 손순흥(孫順興)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손순흥은 어머니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를 못잊어 자기의 손으로 어머니의 초상을 그리어 하루 세 번씩 그 앞에 절하고 삼 일에 한 번씩 산소에 성묘하여 간소한 음식을 생시와 같이 차려 놓고 분향하였다. 이러한 효행이 세상에 알려지자 국가에서도 표창하였다.

또한 송도 서부 모란리(牡丹里)에 사는 박광렴(朴光廉)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박광렴은 어머니를 생각한 나머지 매일 산소에 나가 절하고 돌보고 있을 때 산소 옆에 있는 고사목(枯死木)이 마치 자기 어머니의 모양같이 보였다.

처음에는 의심이 나 자세히 살펴 보았더니 역시 틀림없는 나무였으나 때때로 어머니의 환상이 나타났다.

박광렴은 어머니를 잊을 수가 없어 그 나무를 업고 집으로 돌아와 마루 위에 정성스레 올려 놓았다. 다시 쳐다보니 어머니의 부드러운 모습이 역력이 나타났다.

“어머니!”

큰 소리로 불러 보았으나 대답은 들리지 않고 오직 어머니 모습만 나타날 뿐이었다. 다시 손으로 만져 보았으나 다만 싸늘한 나무만 서 있었다.

이러한 소문이 한번 퍼지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온 나라 방방곡곡에 다 퍼져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 들었다. 그런 중에 박광렴이 어머니를 부르며 여전히 나타났다. 이 광경을 본 여러 사람들은 모두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감동된 것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밖에도 효행과 선행이 줄을 이어 일어났으며 수절(守節)한 여자도 많아 모두 국가에서 표창하여 국가적으로 효행과 선행을 권장하였다.

이 무렵 광종(光宗)의 정치개혁에 반대하는 호족들이 난동을 부리거나 노비들이 옛 주인에게 욕설을 하고 다투는 등의 범죄자를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 순회재판(巡廻裁判)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보기드문 색다른 솟장(訴狀)이 하나 접수되었다.

경상도 상주(尙州)로 시집가서 이미 자녀를 낳고 부유한 생활을 하는 누이와 남의 집 머슴살이로 떠돌아다니며 갖은 고생을 하며 사는 외로운 총각이 있었다.

이 남매의 부모는 상당한 부자였는데 딸 하나를 낳은 후로는 단산(斷産)이 되었는지 10여 년이나 자식을 보지 못했다. 재산은 넉넉했지만 대를 이를 아들을 못 낳는 것이 큰 걱정이었던 모친은 여러 해를 두고 부처님과 산신령에게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젠 아들 낳긴 틀렸으니 소실을 얻어서 손을 이어 볼 생각을 하게나..”

친구들도 부친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 소리는 아내의 귀에도 들어 왔다. 아내도 남편에게 권하지는 않았으나 아들을 못낳는 것이 자기의 죄라고 수긍했기 때문에 남편이 첩을 얻어도 눈을 감아 두려고 했다.

남편은 재산도 제법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웬만한 집의 처녀를 소실(첩)로 맞아드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극히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은 그런 유혹을 물리치고 지냈다. 그럴수록 아내는 미안해서 더욱 열성으로 부처님과 산신령에게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런 지극한 정성에 부처님과 산신령도 감복했는지 아내에게 태기(胎氣)가 있더니 열 달 후에 아들을 낳았다.

“그집 마나님의 정성이 지극하더니 역시 아들을 낳는 복을 받았구만..”

그런 말을 하며 이웃 사람들도 축하해 주었다.

그러나 아내는 평생 원하던 아들을 낳은 후에 산후(産後) 건강이 나빠서 한달 보름이나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허어 이럴 수가 있나.. 아들을 낳아 좋아 했더니 죽다니 사람의 화복(禍福)은 알 수 없군”

이웃 사람들은 전과 반대로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슬프해 주었다. 이제 부친은 당연히 후처를 얻어서 어린 아들을 길러야 할 형편이었으나 그러지 않고 유모에게 맡겨서 길렀다.

그렇게 귀여워 하던 아들이 5살이 되어서 내년쯤은 독선생을 두고 글을 가르치려고 한 살 더 먹기만을 기다리던 부친은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자리에 눕게 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