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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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2.20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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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회

만장의 방청객들은 지금까지의 침묵을 깨드리며 환성을 올렸다.

“그럴거다. 그리고 백지는 억울한 사정을 솟장에 쓰도록 미리 주었던 것이며 오직 지금까지 소송에 이용하지 못한 것은 악독한 누이가 장가도 들 수 없게 학대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또(판관 : 判官)는 말을 잠시 끊었다. 그리고 옆에 배석(陪席)하고 있던 본군(本郡)의 원님을 힐끔 본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유품은 동생이 그런 솟장을 올렸을 때에 만일 유능한 판관(判官)이라면 그 네 가지 유품의 비밀 즉 아버지의 전정한 뜻을 잘 판단하고 일단 그 누이에게 안전하게 보존시켜 두었던 유산을 적어도 반으로 나누어 주리라고 믿었던 증거품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누이가 동생에게 재산을 주지 않으려고 욕심낸 것은 결코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들 부친의 영혼은 딸을 원망한 것이 아니고 네 가지 유품의 비밀을 해명하지 못해서 지금까지 현명한 재판을 못한 판관(判官)을 원망했을 것이다.........”

이 때 본군(本郡)의 원님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보통 같으면 대를 이어서 봉제사를 동생에게 3분의 2의 유산을 찾아주겠지만 누이에게도 그 재산을 온전히 보존한 공이 있으므로 남매가 죽은 부친의 참뜻을 받들어서 사이좋게 반반씩 나누어 갖도록 하라 !”

방청객들은 와 ! 하는 환호성을 질렀다. 누이도 이런 판결에 감탄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동생의 손을 꼭 잡았다.

이 소식이 광종(光宗)의 귀에도 들어 갔고 광종은 손창렴에게 하사품을 내려 공정한 재판을 칭찬했다.

‘과거제’ 시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쌍기는 광종(光宗)의 신임이 두터워지자 더욱 많은 중국인들을 귀화시켜 고려 조정으로 끌어 들였다. 과거제가 실시된 이듬해인 956년에는 자신의 아버지 쌍철을 고려(高麗)로 불러 들였고, 광종(光宗)은 쌍철을 좌승 벼슬에 임명하여 개혁작업에 동참시켰다.

또한 쌍철, 쌍기 부자(父子)가 고려의 실세로 떠오르자 많은 중국인들이 고려로 귀화하였고, 광종은 그들 대부분을 관리로 임명하였다. 이 일에 대해 최승로는 광종(光宗)에게 상소를 올리고 이렇게 말했다.

“폐하 ! 귀화인을 지나치게 관리로 임명하심으로 내국인이 설 자리를 잃고 있사옵니다. 뿐만 아니라 귀화인과 내국인의 정권 대립이 가속화되는 바람에 정국이 혼란스러운 징후가 보이오니 더 이상 귀화인을 관리에 등용하심을 자제해 주시옵소서”

그러자 광종(光宗)은

“나에게도 생각이 있으니 짐이 하고자 하는 개혁정책에 발목을 잡을려고 하지 말라 !”

하고 최승로의 말을 일축해 버렸다.

광종(光宗)이 귀화인들을 중용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광종은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실시함으로써 내국의 호족들과는 등을 돌린 상태였다. 이 때문에 광종은 호족들을 견제할 새로운 신하들이 필요했고, 쌍기를 비롯한 귀화인들로 그 자리를 메웠다.

귀화인(歸化人)들을 지나치게 중용한 나머지 광종(光宗)은 내국 신하의 집을 빼앗아 귀화인들에게 주기도 하였다. 그러자 내국 신하들은 귀화인들에 대한 지나친 대우에 반발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서필(徐必)이었다.

후에 거란(契丹)과 담판을 벌여 강동 6주를 찾아오는 서희(徐熙)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광종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였다. 그래서 광종(光宗)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폐하 ! 소신의 집을 귀화인에게 바치고자 하오니 허락해 주시옵소서”

“어찌하여 집을 바치겠다고 하는가 이유를 말해 보라 !”

“소신이 미리 집을 바치겠다고 하는 것은 소신이 죽고 난 뒤에 자손들 대에서 집을 뺏길바에야 미리 집을 바치고자 하는 것이옵니다. 그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러자 광종(光宗)은 크게 분노하여 말했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집을 뺏을 것이다. 돌아가 있거라 !”

서필(徐必)이 돌아간 후 광종(光宗)은 서필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그의 말이 옳음을 깨닫고 그후 다시는 신하들의 집을 빼앗지 않았다.

광종(光宗)은 ‘과거제’ 실시 2년후에 관료들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여 품계별로 옷을 달리 입게 함으로써 왕과 신하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관리의 상하를 쉽게 판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때가 960년 4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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