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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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4.26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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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회

그리하여 결국 환궁하지 못하고 개경으로 들어오는 노상의 수레(御車)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 때가 1105년이었으며 숙종의 나이는 52세였다.

숙종의 능은 개경 송림현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영릉이다.

숙종(肅宗)의 부인은 명의왕후 유(柳)씨 1명이었으며 그녀에게서 예종을 비롯한 7남 4녀가 태어났다. 명의왕후 유(柳)씨는 정주 사람으로 문하시중 유홍의 딸이다.

정주 유씨는 태조 왕건의 첫부인을 배출한 가문으로 광종 이후에는 왕비를 배출하지 못하다가 숙종 대에 비로소 다시 왕실의 외척이 되었다.

그러다가 숙종이 즉위할 당시에는 정주 유(柳)씨 집안에서 왕비를 배출하는 것에 대해 조정의 반대가 심하여 유씨는 숙종 4년에야 가까스로 왕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는 문종대 이후 계속해서 왕비를 배출했던 인주 이씨 집안과 다른 외척들의 반발 때문이었다.

명의왕후 숙종이 계림후로 있던 시절에 시집을 왔으며 숙종 즉위 이후 칭호를 명부궁주라고 하였다. 이후 다시 연덕궁주로 개칭했고 1099년 3월에 비로소 왕비에 책봉되었다.

숙종(肅宗)이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왕태후에 책봉되었으며, 이 때 그녀가 거처하는 궁을 천화전이라고 개칭하였다.

그리고 1112년 병이 들어 생을 마감했다. 그녀 소생으로는 예종을 비롯한 상당후 필(弼), 원병국사 징엄, 대방공 보, 대원공 효, 제안공 서, 통의후 교 등의 7남과 대령, 흥수, 안수, 복녕 네 공주가 있다.

숙종(肅宗)의 뒤를 이어 고려 제16대 왕으로 등극한 예종(睿宗)은 숙종과 명의왕후 유(柳)씨의 맏아들로서 1079년(문종33년) 1월 정축일(丁丑日)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우(俁)이고 자는 세민(世民)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학에 밝고 시(詩)를 좋아해 학문이 깊었으며, 침착하고 낭만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1094년에 검교사공 주국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벼슬을 받았으며 여러번 승진하여 태위에 올랐다가 아버지 숙종이 왕위에 오른지 5년 만인 1100년에 왕태자에 택봉되었다.

그는 부왕(父王) 숙종이 왕위에 오를 때 이미 17세의 나이였지만 즉시 왕태자에 책봉 되지 못한 것은 숙종(肅宗)은 조카 헌종의 왕위를 찬탈한 입장인 데다가 아래로 동생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숙종은 1098년 12월 신묘일(辛卯日) 차남 왕필을 봉하여 검교태보 수태위 겸 상서령에 임명했는데 이는 왕필로 하여금 왕위를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숙종이 장남을 제쳐놓고 차남을 상서령에 임명한 것은 종실 내에서 권력 다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왕필은 어린 나이로 죽고 숙종의 이복동생 부여후 왕수가 역모죄로 유배되었으며, 두 달 뒤에 숙종은 자신의 장남 왕우를 왕태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왕우는 1105년 10월 숙종이 죽자 2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는데 이 분이 바로 예종(睿宗)이다.

왕위에 오른 예종(睿宗)은 즉위 한 달만에 조정을 대폭 개편했다. 위계정을 문하시중, 최홍사를 문하시랑, 이오를 평장사, 윤관을 중서시랑 평장사, 임의를 상서좌복야, 오연총을 어사대부, 왕가를 이부상서, 정문을 예부상서, 이위를 형부상서, 최유정을 병부상서, 황유현을 호부상서에 각각 임명했다.

예종(睿宗)이 전례없이 이렇게 빨리 조정을 개편하게 된 것은 여진족의 강성으로 국제정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뛰어난 족장 아골타의 영도 아래 급속도로 성정하고 있는 여진족이 중앙집권화를 목적으로 대륙에서 통일전쟁을 지속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고려와 거란의 변방은 항상 전운(戰雲)에 휩싸여 있었다.

더구나 예종(睿宗)은 부왕(숙종)대에 여진(女眞)족에게 대패한데 대한 치욕을 설욕하고자 다짐하고 있었다. 여진족의 군사적 위협이 커지자 예종은 조정 개편이후 곧 바로 이부상서 왕가를 서북면 병마사로, 어사대부 오연총을 동북면 병마사로 파견하여 군대를 전시체제로 갖추어여진족의 동태를 살피고 국경침입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1107년 10월(윤)에 고려(高麗) 조정은 여진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국경 경비군관의 보고가 들어오자 선제공격을 결정하고 17만 대군으로 여진 정벌을 단행하고 윤관을 상원수, 오연총을 부원수에 임명하고 예종은 천문관의 건의에 따라 서경을 떠났다.

왕이 몸소 서경에 가서 변방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겠다는 의도였다.

고려는 숙종(肅宗) 때 여진과의 전쟁에서 대패한 후 보병 중심에서 기마병 중심으로 개편하면서 별무반을 조직하였는데 나이 스물 이상의 모든 백성은 별무반에 의무적으로 가담해야 했다. 문무(文武) 양반에서 아전, 농민, 상인,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이 징발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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