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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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5.0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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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회

척준경의 이 같은 활약에 힘입어 윤관은 몇 차례 어려운 고비를 넘긴 끝에 1108년 1월까지 북방 동계 6성을 완성하여 공험령에 비를 세우고 국경으로 정하게 되었으며 이 6성을 함주, 영주, 웅주, 길주, 복주, 공험전이라고 하였다.

이때 윤관이 점령한 지역은 면적이 3백 리이며 동쪽으로는 대해에 접했고, 서북방으로는 개마산을 끼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정주와 정주 두 고을에 접했다.

그리고 그해 3월에 의주, 통대진 평윤진 세 성을 더해 9성을 완성했다. 이것이 윤관의 동북 9성이다.

비록 윤관이 9성을 설치하여 여진정벌에 성공하긴 했으나 여진군의 반격이 계속 이어졌다. 여진은 이 같은 군사적 대응과 함께 외교경로를 통해 9성 반환을 조건으로 화의 조약을 제의해 왔다. 이 때문에 고려 조정 내부에서는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9성 반환을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은 김인촌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9성 때문에 여진과 고려 양측이 너무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고려가 비록 9성을 차지하고 있더라도 거란과의 국경분쟁을 일으킬 소지마저 안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게 되면 고려는 졸지에 여진과 거란이라고 하는 두 나라를 상대로 불리한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따라서 9성을 돌려주고 여진으로부터 조공을 확약받는 것이 현명합니다”

하고 말했다.

김인촌은 처음 윤관을 비롯한 모든 대신들이 여진정벌을 결정할 때도 강력하게 반대했던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논리가 뛰어나고 앞날을 내다보는 예지력(叡智力)이 있었기 때문에 숙종 때부터 왕의 신임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그러다보니 예종(睿宗) 역시 김인촌을 매우 신임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진정벌 만큼은 자신의 소신대로 밀고 나갔다.

그런데 9성 건립 후 여진족의 반격으로 전쟁이 끓이지 앉자 예종은 해결책으로 9성 반환을 검토하게 되었다. 그런 차에 김인촌이 나서서 애초에 여진(女眞)을 공격한 것부터가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9성을 돌려줘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조정 백관들도 대부분 김인촌의 9성 반환론에 동조하고 있었다. 박승중, 한상 등이 반환론을 공격하며 9성을 지컬 것을 주장했지만 대세는 이미 반환론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국경 변방에 나가 있던 윤관도 여진족에서 강화를 제의하자 그들의 교섭단을 위해 길을 열러준 상태였다.

당시 오연총이 영주성 전투에서 대패했기 때문에 고려군은 기세가 많이 꺾여 있었다. 따라서 9성의 반환으로 정쟁을 종식해야 한다는 주장이 병영 내부에서도 큰 호응을 얻고 있었다.

9성 반환과 관련한 움직임이 빠르게 진행 되었다. 그리고 1109년 7월 예종은 문무(文武) 3품 이상의 신하들에게 가부(可否)를 물자 대부분의 신하들이 9성 반환에 찬성하였고, 이에 따라 예종(睿宗)은 9성 반환을 결정했다.

반환조건은 여진이 다시는 고려를 침범하지 않고 매년 조공을 받친다는 내용이었다.

여진(女眞)과 고려 사이에 강화조약이 맺어지자 9성 반환은 기정 사실화되었고, 고려군(高麗軍)이 각 성에서 철수함으로써 동북 9성을 사이에 둔 고려와 여진의 전쟁을 끝이 났다.

전쟁이 끝나자 윤관과 오연총, 임언 등에게 패전한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고 연일 왕 앞으로 그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가 들어왔다.

하지만 예종(睿宗)은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대간과 간관들이 모두 파업을 단행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최홍사, 임의, 이오 등이 주축이 된 이 탄핵사건은 수십 일을 끌다가 예종의 중재로 합의점을 찾았다. 예종은 윤관에게는 죄를 주지 않고 오연총을 비롯한 몇몇 책임자만 관직에서 물러나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몇 개월 뒤에 다시 관직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왔다. 예종(睿宗)과 윤관의 여진정벌은 이처럼 허무하게 끝이 났지만 성과가 전연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여진(女眞)에게 대패했던 과거의 치욕을 씻었고, 별무반을 조직했던 경험으로 보병 (步兵) 중심에서 기동력이 뛰어난 기마병(騎馬兵) 중심으로 전술이 바뀌었고 정규군 이외에 언제든지 농민군을 동원할 능력을 배양하게 되었다.

또한 후에도 여진(女眞)이 함부로 고려 국경으로 넘어오지 못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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