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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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5.09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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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회

이튿날 아침, 척준경은 비로소 자신의 아우 천준신과 아들 척순의 시체를 발견하고 복수를 결심했다. 그는 군졸을 불러 모아 최탁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말하고, 궁성을 포위할 것을 명령했다.

여기에 승려(僧侶) 의장이 이끄는 현화사 승병 3백여 명도 가세했다.

이렇게 되자 궁성 병력은 졸지에 포위당하는 꼴이 되어 성문 위에서 활을 쏘며 수비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갑자기 신봉문 위에 인종(仁宗)이 황색 양산을 펴보이며 나타나자 척준경은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왕이 이미 역도들에게 붙잡혀 죽은 것으로 알고 있던 척준경의 군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던 것이다.

왕이 수하를 시켜 병졸들에게

“너희들은 왜 무기를 가지고 왔느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병졸들은 척준경에게 들은 대로

“적이 궁중으로 침입했다고 해서 사직을 수위하려고 왔을 따름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인종(仁宗)은 그 대답을 듣고

“짐은 무고하니 무장을 해제하고 물러가라”

하고 명령하고 내탕고를 열어 은과 비단을 꺼내 성(城) 위에서 밧줄에 달아 내렸다.

또한 인종(仁宗)은 시어사 이중과 사인 호종단을 시켜 군사들에게 갑옷을 벗고 무기를 버리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병졸들이 왕명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척준경은 분노하여 이중과 호종단을 몰아내고 화살 공격을 명령하엿다.

이 때 이자겸은 함문지후 최학란과 도병마사 녹사 소역을 궁문 밖에까지 보내서 인종에게 협박하는 말투로 궁중에서 변란을 일으킨 자들을 내보지 않으면 궁중이 위험해질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인종(仁宗)은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이자겸은 척준경과 협의하여 궁성 공격을 명령했다. 전투 경험이 많던 척준경은 밤이 되면 오히려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날이 어둡기 전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 가장 빠른 해결책이라고 말하자 이자겸은 그의 의견을 따랐다.

척준경은 화공(火攻)을 하기로 결심하고 동화문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그러자 바람에 불꽃이 날려 삽시간에 내청까지 불길이 번졌고, 궁인들은 혼비백산하여 모두 뿔뿔히 흩어지고 궁성 병력들도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며 어쩔줄을 몰랐다.

불길은 밤까지 계속 타올랐고, 궁성 안의 병사들은 불길과 연기를 피해 밖으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척준경은 궁성을 빠져나오는 사람은 무조건 죽이라고 명령하고 부하들로 하여금 각 성문을 지키게 하였다.

척준경의 화공으로 패색이 확연해지자 궁성 병력을 이끌고 있던 오탁은 왕을 호위하여 서문으로 빠져 나가고 나머지 병력은 밀어닥친 척준경의 병력과 싸우다가 잡히거나 죽음을 당했다.

또한 인종(仁宗)을 인도하던 오탁도 척준경이 보낸 낭장 장성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최탁, 권수, 고석 등의 장수들도 모두 척준경이 보낸 군사들에 의해 살해당했고, 궁성 병력에 가담한 대장군 윤성, 장군 박영, 좌복야 홍관 등도 살해되었다.

두 군사들 간의 무력 충돌은 전쟁처럼 격열하게 전개되었다. 이 전투에서 척준경의 궁성병력을 완전히 제압하였다. 인종(仁宗)은 근신 10여 명과 함께 궁궐을 버리고 산호정으로 피신했다.

궁궐의 대부분은 소실되었고 산호정, 상춘정, 상화정과 같은 정자(亭子)들 제석원 등 행랑 수십 칸만 겨우 남아 있었다.

사태가 끝나자 이자겸은 궁성 세력에 협력한 사람들은 모두 참수하고 그의 가족들과 친척들도 죽이거나 유배시켰다.

그러자 인종(仁宗)은 이자겸에게 사람을 보내어 왕위를 넘겨줄 조서를 내렸다. 하지만 이자겸은 대간과 조정 대신들의 공론이 두려워 기회를 엿보다가 그의 재종형 이수가 이자겸을 꾸짖으며

“신하로서 그 같은 왕의 조서를 받아들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며 호통을 쳤다.

하지만 이자겸은 왕과 같은 행동을 하면서 인종을 자신의 사택인중흥택 서원에 감금해 버리고 모든 정사를 자신이 주관하며 결재하였다.

그러나 인종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다시 이자겸을 축출하기 위해 내의원 최사전과 모의하여 척준경과 이자겸을 이간질시키기로 결의하다. 그래서 왕은 척준경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오직 나의 불찰로 흉악한 자들이 일을 저지르도록 방치함으로써 대신들에게 근심과 수고를 끼쳤다. 이것은 모두 나의 잘못이다. 이제부터 스스로를 반성하고 잘못을 뉘우치며 신민들과 함께 새롭게 정사를 꾸려 갈 것을 맹세하노라.....

.....그대는 더욱 수신에 힘쓰고 기왕의 일은 다시 생각지 말것이며, 성심껏 나를 보좌하여 후환이 없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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