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상태바
[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5.13 13: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10회

그 사이에 척준경은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천복전으로 달려가자 인종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척준경은 인종(仁宗)을 보자

“폐하 ! 소장이 옥체를 지켜드릴 것이오니 소장을 따르시옵소서”

하고는 인종을 인도하여 궁궐을 빠져 나오자 이를 지켜보던 이자겸의 부하들이 활을 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척준경은

“이놈들아 ! 어디에서 활을 쏘느냐 ? 활을 멈추지 못할까...”

하며 호통을 치자 위세에 눌린 그들은 공격을 중지했다.

척준경은 인종을 안전한 군기감에 데려다 놓고 부하들로 하여금 호위하도록 한 다음 승선 강우현을 이자겸의 집에 보내어 이자겸을 잡아 오도록 하였다.

그러자 집에 있던 이자겸은 소복을 입고 나타났다.

척준경은 이자겸과 그의 처자(妻子) 등 가족들을 모두 팔관보에 가두고 그를 호위하고 있던 장군 강화와 고진수를 참살했다.

또한 병사들을 풀어 이자겸의 잔당을 모두 잡아들이고 반항하는 자는 죽여 버렸다. 그리고 왕을 다시 궁궐로 모셔갔다.

이 때 이자겸의 아들 이지미는 군사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리를 듣고 병력 1백여 명을 이끌고 광화문(廣華門)이 도착했으나 문이 굳게 닫혀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이자덕, 김인규 등과 함께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병부로 갔다. 이지미는 그때까지도 이자겸이 체포된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저녁 무렵에 순검 병사들이 병부로 달려와 자신을 포박했을 때야 비로소 아버지 이자겸과 자신의 형제들을 비롯한 도당이 모두 체포된 사실을 알았다.

이자겸 일당이 모두 체포된 다음 날 궁궐을 청소하던 내시들이 내침에서 현화사 승려 의장을 발견하였다.

그는 침소에 숨어 있다가 왕을 살해하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의장 역시 내시들에게 잡혀 압송되어 팔관보에 갇혔다.

1126년 5월에 일어난 인종(仁宗)의 이자겸 제거로 ‘이자겸의 난’은 종결되었다. 그리고 이자겸은 그의 처 최씨와 아들 이지윤 등과 함께 영광에 유배되었다. 조정의 신하들은 대부분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인종은

“경들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이자겸은 나의 외조부이자 장인이라 참형에 처하기는 어려우니 경들이 이해가 있기를 바라오”

하고는 유배형에 그쳤다.

이들 외에도 이자겸의 두 딸이 왕비에서 쫓겨났고, 이지미는 협주로, 이공의는 진도로, 이지연은 거제로 각각 유배되었으며, 측근 30명과 사노비 90명도 전국 각지에 유배되었다.

달구지에 실려 귀양길에 오는 이자겸의 모습을 보기 위해 길가에는 동네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지나치게 권력을 욕심내다가 저 모양이 되었구만. 쯧쯧쯧..”

“지나친 욕심이 화를 불렀지 쯧쯧쯧...

“임금을 쫓아낼려고 반란을 했다니 죽어 마땅한데도 귀양을 보내다니..”

“그야 임금의 외조부니까 봐준거지...”

“법은 공평해야지 봐주다니...”

이자겸은 영광으로 귀양간 후 석달이 지나자 자객에 의해 참살되었다. 이자겸의 몰락으로 경원 이씨는 이후 다시는 왕비를 배출하지 못했다.

또한 경원 이씨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귀족의 반열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편 이자겸을 체포한 척준경은 이듬해(1127년) 3월, 정지상은

“이자겸을 제거한 일은 일시의 공(功)이나 궁궐을 범하고 불사른 것은 만세의 죄이니 마땅히 유배되어야 하옵니다”

하고 왕에게 탄핵 상소를 올렸다. 조정의 많은 대신들도 정지상의 탄핵상소에 동조하자 인종(仁宗)은 척준경을 유배할 것을 명령했다. 척준경은 암타도로 유배되었다가 곡주로 다시 옮겨졌다가 그곳에서 등창으로 죽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