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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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5.14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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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회

이자겸이 죽고 난 뒤 3년이 흐르자 인종은 자신의 외조모이자 장모인 이자겸의 처(妻) 최씨를 개경(開京)으로 소환하였다.

이 때 인종은 이자겸을 다시 한양공에 봉하고 최씨를 변한국 대부인의에 봉함으로써 진시황이 옹에 가두었던 자신의 모친을 함양 감천궁에 모신 선례를 따랐다.

즉위 초부터 이자겸의 세력에 의한 한안인 일파 축출사건으로 피비린내를 풍긴 고려왕실은 ‘이자겸의 난’을 치루면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이 때문에 인종(仁宗)은 개경(開京)의 지덕(地德)이 다했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서경천도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인종(仁宗)이 서경천도론에 관심을 갖게 된 근본 원인은 개경 세력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인종은 이자겸의 난 때 보여준 개경 귀족 세력의 방관적인 자세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묘청을 앞세운 서경 세력의 천도론이 불거져 나왔다.

이자겸의 난으로 수창군이 완전히 불에 타고 개경(開京)의 민심이 흉흉해져 있었기 때문에 인종이 서경(西京) 천도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경(西京)으로 천도할 것을 결심한 인종은 1127년부터 자주 서경에 거동하며 명당자리를 물색하였고 임원역(현재 함경남도 대동군 부산면 신궁동)이 적지로 선정되어 대화궁을 짓도록 하였다. 하지만 서경천도는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쳐 백지화되고 말았다.

인종(仁宗)이 서경천도를 백지화 한 이유는 대화궁이 중공 직후에 벼락을 맞아 30여 곳이 파손되는가 하면 인종이 서경 행차를 하는 도중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인종을 태우고 가던 말이 놀라 엉뚱한 곳으로 달려가 진창에 빠져버렸다.

왕을 호위하던 시종들은 왕의 행방을 잃고 찾아다니는 사태가 벌어졌다. 게다가 그날 밤 눈발이 날려 낙타가 죽고 말과 사람이 다치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묘청을 배척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1133년 직문학성 이중, 시어사 문공유 등이 상소하여 묘청을 비롯한 그 일당들을 멀리할 것을 간언하였다.

더구나 인마(人馬)가 살상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은 불길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인종도 천도계획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동안 복구공사를 마친 수창궁으로 돌아가 개경을 다시 정비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서경천도가 백지화로 돌아가자 1135년 1월, 묘청을 위시한 조광, 유참 들의 서경 세력이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대의 호칭을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서경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은 인종(仁宗)은 김부식을 평소원수에 임명하고 1만의 군사를 주어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하였다. 왕명을 받은 김부식은 서경파의 일원으로서 개경에 남아 있던 백수한, 김안, 정시상 등을 참수하고 좌. 우. 중 3군으로 나누어 이끌고 서경으로 진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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