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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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5.15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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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회

김부식의 정부군이 개경을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성들이 호응하여 전세(戰勢)는 서경 세력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김부식은 여덟 차례 걸쳐 반군을 지휘하고 있던 조광에게 사람를 보내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다.

하지만 조광은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자주 패하게 되자 정부군에게 투항하는 반군의 수가 늘어나면서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조광은 묘청과 유담, 그리고 유담의 아들 유호의 목을 베어 윤첨에게 시켜 개경으로 가져가도록 하였다.

조광이 이처럼 항복의사를 밝혔지만 개경측에서는 윤첨을 하옥시키고 조광의 단죄를 결정하였다. 그러자 조광은 결사 항전을 다짐하고 인종이 희유교섭을 보낸 전중시어사 김부와 내시 황문상 등을 죽였으며, 김부식이 보낸 녹사 이덕경도 참수해 버렸다.

또한 조광은 1730칸에 이르는 성을 쌓고 정부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대비하였다.

하지만 조광의 반군은 정부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제압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반군을 이끌고 있던 조광은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스스로 자결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서경 세력이 주도한 묘청의 난은 완전히 막을 내렸고 이로써 인종은 즉위 후 처음으로 안정된 정국을 맞이했다.

그런데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했던 윤언이(윤관의 4남)를 탄핵하여 좌천시킨 일이 있었다. 하지만 1140년 사면령이 내려져 윤언이가 정계에 복귀할 기미를 보이자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 김부식은 세 번이나 사직(辭職)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 무렵 그의 동생도 사망하고 없었고 자신의 지지 세력들도 탄핵을 받아 물러난 상태였기 때문에 김부식은 정계은퇴를 결심했던 것이다.

인종(仁宗)은 김부식의 이 같은 쓸쓸한 정계 은퇴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8명의 젊은 관료를 보내 [삼국사기]의 편찬을 명령했다.

이자겸의 반난으로 많은 사료(史料)들이 불타고 없어졌기 때문에 사료복원 차원에서 진행된 일이었지만 인종(仁宗)은 과거사를 정립하여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신하의 자세를 확립하려는 의도가 강하였다.

왕명을 받은 김부식은 그 후 5년간의 작업 끝에 [삼국사기]를 완성하여 인종이 죽기 2개월 전인 1145년 12월에 왕에게 올렸다.

총 50권의 책이 왕 앞에 놓여지자 인종(仁宗)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참으로 그대의 노고가 지대하였소이다. 이제 먼 자손만대에까지 그대의 노고가 영원히 빛을 발휘할 것이오”

하며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의 노고를 치하했다.

중국의 정사체로 기록된 [삼국사기]는 총 50권으로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 통일신라 12권), ‘지(志) 9권, ’표(表) 3권, 열전(列傳)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 사서가 열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에 반해 [삼국사기]는 ‘본기’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특징이다. ‘본기’의 주요 내용은 정치, 경제, 천재지변, 전쟁, 외교 등으로 분류된다.

또한 ‘잡지’라고 이름붙인 ‘지(志)’에서 제1권은 제사와 음악, 제2권은 색복, 수레, 용기, 집을 다루고 있으며, 제3권에서 6권까지는 지리, 7권에서 9권은 직관 및 중앙관부, 궁정관부, 무관과 외직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표(表)’에서는 박혁거세 즉위년(서기전 57년)부터 신라 56대 경순왕까지를 연표로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열전(列傳)’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주요 인물들을 다루고 있는데 뚜렷한 편찬 기준도 없고 왕후, 공주 열전도 없어 중국 사서의 열전에 비해 매우 빈약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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