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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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6.2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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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충수의 각오가 너무 확고하여 이의민 일당을 제거하기로 작정하고 최충헌에게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싹이 커지면 잘라내기 어렵습니다. 마음에 담아 둔 참에 칼을 뽑아야 하겠습니다”

“너의 각오가 그렇다면 제거해 버리세”

이의민을 제거하기로 결심한 최충수는 결국 자신의 형 최충헌과 모의하여 이지영을 비롯한 이의민 일가와 그 측근들을 도살할 계획을 세웠다.

1197년 3월 최충헌 형제는 무예가 출중한 수하 장졸 200여 명을 모아 단숨에 이의민을 포함하여 세 아들과 측근들은 모조리 도살하여 이의민 일가를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이의민의 세력을 단숨에 척살하고 권력을 잡은 최충헌(崔忠獻)은 자신이 직접 이의민의 목을 베 저잣거리에서 효수하고 장군 백존유와 결탁하여 왕(明宗)에게 찾아가

“이의민이 왕위를 노려 반란을 도모하였기에 이의민 일가를 척결하였사옵니다”

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이경유, 최모청과 함께 이의민의 잔당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는 평장사 권절평, 손석, 상장군 길인 등이 거병을 도모하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권절평의 아들 권준과손석의 아들 손홍원을 불러 술을 마셨다.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이 담소를 즐기다가 그들이 빈틈을 보이자 수하 장졸들에게 눈짓으로 명령하여 살해하였다.

그 후 최충헌(崔忠獻)은 수하 장졸들을 각처로 파견하여 권절평, 손석, 권윤, 유삼상, 최혁윤 등을 살해했다. 이 소식을 들은 상장군 길인은 장군 유광, 박공습 등과 함께 거병을 결심하고 도성 내에 머물던 환관 및 금위군과 노비 1천명을 모아 최충헌에 대항했다.

이들은 최충헌(崔忠獻)이 군대를 이끌고 오자 궁문을 걸어 닫고 방비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백존유가

“궁문을 열지 않으면 화공으로 공격하겠다! 빨라 궁문을 열지 못하겠느냐?”

소리치며 화공(火攻)을 사용하려 하자 길인이 겁을 먹고 달아남으로써 싸움은 최충헌(崔忠獻)의 승리로 끝이 났다.

승기를 잡은 최충헌은 곧 참지정사 이인성을 비롯한 38명의 관료들을 체포하여 인은관에 감금했다가 살해했고, 최광원, 두응룡 등의 무신들은 변방으로 귀양보냈다.

그리고 왕(명종)은 쫓겨나고 평양공 왕민(王旼)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이 분이 바로 신종(神宗)이다.

비록 새로운 왕을 세웠으나 모든 권력은 최충헌이 장악하고 있었다.

명종(明宗)은 의정왕후 김씨에게서 강종(22대 왕)과 연희, 수안 두 공주를 얻었으며, 여러 명의 후궁에게서 10여 명의 아들을 낳았다. 의정왕후 김씨는 강릉공 김온(金溫)의 딸이며, 명종이 익양후로 있을 때 시집을 왔다.

그리고 명종이 왕위에 오른 후 의정왕후에 봉해졌다가 사망 후 아들 강종(康宗)이 왕위에 오르면서 광정태후로 추존되었다.

강종(康宗) 이외에 명종(明宗)에게는 다섯 명의 후궁과 아들이 있었다. 아들은 선사, 홍기, 홍규, 홍균, 혼각, 홍호 등이었다. 이들 중 선사는 열 살 때 명종의 명령으로 승려가 되었으며, 출가 중 벼슬을 받고 유명한 혜덕사 사찰을 택하여 거주하였으며, 권세를 부리고 뇌물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명종이 왕위에서 추방될 때 모두 남해에 있는 무인도(無人島)로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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