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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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7.01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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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1199년에는 명주(강릉)에서 도적이 일어나 삼척과 울진 두 현을 함락시켰다. 또 동경(경주)에서도 도적이 일어나 명주현의 도적과 연합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다.

또한 1200년 4월에는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났으며, 같은 달에 밀성의 관노(官奴) 60여 명이 관가를 습격하고 운문에서 일어난 난민들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해 8월에는 동경(경주)에서 이의민의 친족들과 동경(경주) 아전들이 싸움을 벌여 동경(경주)의 방수, 별장, 통인들이 모두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김해(金海)에서는 하층민들이 호족들의 횡포를 참다못해 반란을 일으켜 호족들을 내쫓고 관아를 포위하면서 관군과 대치하기도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신종(神宗)은 낭자 오응부와 합문지후 송공작 등을 명주(강릉)에 보내고 장작소감 조통과 낭장 한지 등을 동경(경주)에 보내 도적들을 달랬다.

하지만 1202년에 탐라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 소부소감 장윤문과 중랑장 이당적을 파견하여 가까스로 백성들을 무마하고 반란을 주동한 번석과 번수를 참형하였다.

또한 동경(경주)에서는 별초군이 운문의 반란민과 동화사, 부인사의 승려들과 결탁하여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던 영주 백성과 동경(경주) 백성 간에 대대적인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은 영주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조정은 동경(경주)에서 계속되는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동경(경주)에 중안군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감시토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동경(경주)에서 패좌. 고궁 등이 주동이 되어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조정은 김척후, 최광의, 강순의 등을 시켜 그들을 진압하였다.

이처럼 전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정국 불안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 최충헌(崔忠獻)의 벼슬은 거듭 승진되었다. 1197년에 상장군에 오른 최충헌은 그해 12월에 추밀원지주사가 되고 1199년 12월에는 수태위상주국, 1200년 12월에 추밀원사와 병부상서, 어사대부 등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12월에는 태부참지정사 및 이부상서 판 어사대서 태자소사에 올라 조정의 병권 및 인사권, 행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써 최충헌(崔忠獻)은 장기집권의 토대를 구축하였고, 고려 왕실의 권력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또한 최충헌은 백성들을 회유하기 위해 왕(신종 : 神宗)으로 하여금 죄수들을 대거 석방하도록 했으며, 과거(科擧)를 실시하여 인재를 뽑았다.

1203년 12월 왕(신종)은 등창으로 병석에 누웠다. 그리고 이듬해 1월 태자 덕(德)에게 선위하고 둘째 아들 덕양후의 저택에서 6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신종(神宗)은 개성 남쪽에 묻혔으며 능호는 양릉이다.

신종(神宗)은 선정왕후 김씨에게서 희종, 양양공 서, 효희공주, 경녕공주, 등 2남 2녀를 얻었다. 선정왕후 김씨는 강릉공 김온(金溫)의 딸이다.

그녀는 신종이 평양공으로 있을 때 결혼하여 1197년에 신종이 즉위하자 원비에 책봉되었다가 1200년에 왕비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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