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상태바
[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7.05 14: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46.

또한 1209년 4월에는 청교역리 5명이 최충헌 부자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주모자들은 공첩을 위조해서 각 사찰에 집회 공문을 보냈다. 귀법사에 공문을 전달하러 갔던 송연이라는 자가 그곳 승려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거사(擧事) 계획이 탄로하고 말았다.

귀법사 승려로부터 자신을 살해하려는 음모가 진행 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최충헌은 영응관에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대대적인 범인 색출작업에 나섰다.

그러기 위해 최충헌(崔忠獻)은 심복 부하들을 곳곳에 배치하여 반란(反亂) 음모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기에 혈안이 되었다.

청교역리들의 음모가 발각된 것도 바로 최충헌(崔忠獻)이가 배치해 놓은 첩보원에게 발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체포된 청교역리들이 형틀에 묶여 잔흑한 고문을 당하는 과정에서 우복야(벼슬) 한기도 역시 공모자라고 이실직고 하는 바람에 최충헌은 한기도와 그의 세 아들을 죽이고, 장군 김남보와 김종빈를 비롯한 9명을 공모자로 몰아 처형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주변 인물들은 모두 체포하여 남해의 무인도에 유배되었다.

이 때 최충헌이 설치한 교정도감은 본래의 설치 목적을 벗어나 최충헌의 정보기관으로 변질되었고, 교정도감에서 일하는 관리들은 최충헌(崔忠獻)에게 충성에게 맹세하고 첩자노릇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무신(武臣)들의 정사 토론 기구인 중방은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전락되었다. 최충헌은 스스로 교정도감의 별감으로 있으면서 그 곳에서 모든 국정을 처리했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최충헌의 아들 최이가 교정별감직을 세습하여 왕권을 대신하게 되었다.

청교역리들의 최충헌 암살계획 사건이 발생한지 1년만인 1210년에는 직장동정 원서와 재상 우승경이 최충헌을 암살하려 한다는 익명의 투서가 최충헌에게 날아들어 다시 한번 피비린내나는 살상(殺傷)이 벌어졌다.

투서(投書)를 입수한 최충헌은 즉시 원서와 우승경을 체포하여 형틀에 묶어 놓고 문초하였다.

최충헌(崔忠獻)의 문초가 시작되자 원서는

“억울합니다, 나는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자 최충헌은 노발대발하여

“이놈이 실토를 하지 않는구나. 더욱 매질은 가하라!”

하고 명령하자 형리들은 원서에게 더욱 심한 매질을 하였다. 원서는 비명을 지르면서

“억울합니다. 정말 억울합니다. 아무 죄도 없는 무고한 사람을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억울하고 또 억울합니다”

하면서 거듭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투서는 유익겸의 소행일 것입니다. 분명히 유익겸이 나를 모함하기 위해서 한 짓일 것입니다. 하오니 유익겸을 불러 문초해 보십시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최충헌(崔忠獻)은

“유익겸이라?”

하면서 벌떡 일어나

“여봐라 군사들은 나를 따라 오너라
하면서 유익겸의 집으로 달려가 유익겸의 집을 수색하였다. 그러자 방안 문갑에서 정말 투서의 초안이 발견되어 가까스로 누명을 벗은 원서와 우승경은 죽음을 면하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