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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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9.09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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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소경이 간 다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축동 안으로 들어가라고 일러주던 늙은 놈이 수상했다. 이택수는 어제 저녁 그 늙은이를 만났던 축동 밖이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 길에서 서성이면서 그 늙은이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해가 떨어질 무렵에야 그 늙은이는 나타났다. 또 누구를 이끌어 들이려는지 큰 길가를 왔다갔다 서성이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웬 농부 한 사람이 가다가 늙은이에게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이택수는 그 농부의 뒤를 쫓아가서 예사로이 말을 주고 받다가 당신이 아까 인사한 늙은이는 아무래도 낯이 익은데 실수를 할까봐 인사를 못올렸다고 말하고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농부는 그의 성명은 이 동네에서도 자세히 알 수 없고 그저 안초시(安初試)라고 부른다고 했으며,어떤 이는 안학진(安學鎭)이라고도 부른다고 말했다.

다시 그 사람의 집을 물으니 그의 집은 바로 그 축동 동구 안에 있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며 재산이 백만거부라고 했다.

이택수(李澤洙)는 짐작이 갔다. 이택수는 그 길로 상경해서 박승지를 찾아뵈옵고 그가 당한 일을 상세히 말했다. 그리고 자기 처지로는 정장(呈狀)을 할 수도 없는 형편이라 관청에 분부를 하여 그 놈의 집을 수색하고 도적을 잡아다 문초하도록 해달라고 애원하였다.

박승지는 곧 관청 사또에게 서신을 보내어 불러 온 후 그 사실을 이야기 했다. 이택수는 자기가 길잡이가 되어 도적 소굴을 소탕하는데 협력하겠노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그날 저녁으로 고을 사또의 지휘로 수십 명의 포졸들이 달려가서 야밤을 이용하여 그 집을 급습하고 그 일당을 모조리 포박하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도적과 같은 불한당(不汗黨) 소굴이었다.

그 도당의 수법은 매번 이택수(李澤洙)의 경우와 같았다. 부잣집 재물을 갖고 가는 과객이 있으면 처녀로 하여금 꼬여 들여 밤 사이에 그러한 수단을 썼던 것이다.

그런 방법으로 모은 재물이 수만 금이었고, 곡간에 쌓여 있는 장물들을 들추어 본 결과 수십 년 내에 일반 사람들이 이 부근을 지나가다가 도적을 맞았다는 허다한 도적 사건이 모두 그 도당의 짓이었음이 밝혀졌다.

이리하여 양근 고을에서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던 사건이 풀려나게 되었고 그 진원지가 없어지게 되었으니 관가로 볼 때 이택수(李澤洙)는 여간한 공로자가 아니었다.

고을 관가에서는 이 사실을 조정(형조 : 刑曹)에 얼렸고, 보고를 받은 조정(형조 : 刑曹)에서는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元宗)은 그 이택수를 표창하는 뜻으로 음직(蔭職 : 조상의 덕으로 하는 벼슬)으로서 그의 고향인 괴산 고을 이방(吏房)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2년 후인 1274년 6월 태자 심(王諶)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원종은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능호는 소릉이다.

원종(元宗)은 정순왕후 김씨와 경창궁주 유씨 2명의 부인를 두었으며, 그들에게서 3남 2녀를 얻었다. 정순왕후 김씨는 태자비로 있을 때 태손 심(王諶 : 충렬왕)을 낳았으며. 경창궁주 시양후 이(왕이), 순안공 종(왕종), 경안궁주, 함녕궁주 등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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