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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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9.16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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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쿠빌라이는 원종에게 고려에 난파한 남송의 상선을 그냥 돌려 보낸 일을 따지는 한편, 왜국(일본)으로 가는 고려의 귀화인을 통해 한때는 왜국(일본)이 해마다 고려에 공물을 바쳤다는 말을 들었다며 고려가 일본과 내통하고 원나라와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지 않느냐고 추궁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고려(高麗)는 남송(南宋)의 배를 놓아준 적은 있으나 그것은 단순한 상선에 불과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왜국(일본)에게서 공물을 받았다는 문제도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하였다.

그런데 1272년 삼별초의 난이 한창이던 때에 이를 진압하러온 홍다구에 의해 새로운 문제가 하나 제기되었다. 홍다구는 서경(西京)의 낭장으로 있다가 몽고에 투항한 홍복원의 아들로 몽고에서 관직을 받고 있었으며, 조이와 함께 고려를 자주 곤궁에 몰아넣은 인물이었다. 홍복원은 몽고에 전향한 이후 줄곧 몽고군을 인도하여 고려 침략을 도왔기 때문에 몽고 조정의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그런데 홍복원은 당시 몽고에 볼모로 가 있던 영녕공 왕순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다가 왕순의 아내를 분노케 하여 몽고 칙사에게 참살 당하게 되었다. 왕순의 아내는 몽고 왕족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남편을 능멸하는 홍복원을 칙사에게 고발했던 것이다.

그러자 칙사가 홍복원을 죽이고, 홍보원의 처와 아들인 홍다구, 홍군상 등을 포박하여 데리고 갔다.

그후 홍다구는 쿠빌라이에게 신망을 얻어 다시 관직을 얻어 아비(홍복원)의 죽음에 대한원한으로 고려 조정을 곧잘 궁지에 몰아넣곤 하였다. 그리고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몽고군을 이끌고 고려에 왔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삼별초 난이 한창 진행중이던 1272년이었다. 그해 왜국 선박이 김해에 정박한 일이 있는데 경상도 안무사 조자일은 왜국 선박이 정박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다시금 원나라에부터 고려가 왜국(일본)과 연계를 가지고 원나라를 치려고 한다는 오해를 사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왜국 선박을 돌아가게 하였다.

그런데 홍다구가 이 사실을 알아내고 조자일을 문초하였고, 이 일을 곧바로 쿠빌라이에게

“고려가 왜국(일본)과 통상을 하고 있으니 이에 대한 강력한 조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보고를 하였다.

홍다구의 보고를 받은 쿠빌라이는 매우 분노하였고, 장수들을 불러 모아 왜국(일본)을 정벌할 것을 결정하고, 본격적으로 전쟁준비에 돌입하였다. 이 때가 1274년 3월이었다. 이 때 홍다구는 병선(兵船)을 건조하는 감독관이 되어 조선(造船) 작업을 독촉하고 각처에서 뛰어난 사공을 징집하였다.

그리고 고려에서는 원종(元宗)이 죽고 충렬왕이 즉위한 지 4개월 만인 1274년 10월 드디어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은 일본정벌 길에 올랐다.

연합군은 총 4만 명으로 몽고군 및 한(漢)군 2만 5천, 고려 육군 8천, 수군 6천 7백으로 이뤄졌으며, 여기에 여진군 5천이 가담하기로 하였으나 여진군이 출병 시간을 지키지 못하자 여진군을 제외한 병력만으로 드디어 일본정벌 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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