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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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9.1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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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고려군은 도독사 김방경이 중군(中軍)을 통솔하고, 박지량, 김혼을 지병마사로, 임개를 부사로 삼았으며, 김선을 좌군사, 위득유를 지병마사, 손세정을 부사로 임명하였다. 또 김문비를 우군사로 삼고, 나유와 박보를 지명마사, 반부를 부사로 임명한 후 전체를 삼익군이라고 하였다.

한편 몽고는 도원수 흘돈을 원수로, 홍다구를 우부원수로, 유복형을 좌부원수로 삼아 군사를 통솔하게 하였다.

고려(高麗)와 원(元)나라 연합군은 합포를 떠나 곧 대마도에 도착하여 맹공을 퍼부어 섬을 장악했으며, 그 여세를 몰아 다시 일기도(一岐島)로 진격하자 왜군(倭軍)이 진을 치고 버티고 있었다. 이에 따라 연합군과 왜군간에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이 전쟁에서 왜군은 1천여 명의 희생자를 내며 대패하였다.

하지만 왜군(倭軍)이 다시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여 좌부원수 유복형이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는 등 피해가 속출하자, 연합군은 뱃머리를 돌려 후퇴하였다. 그런데 퇴각하던 날 밤에 갑자기 폭풍이 몰아쳐 병선들이 파손되고 군사들이 수장(水葬)되는 바람에 연합군은 황급히 귀환하였다.

이렇게 해서 왜국원정에 실패한 원나라의 쿠빌라이는 1277년에 다시 왜국(일본)정벌을 독촉하였다. 하지만 이 때 위득유 등이 김방경의 갑옷을 감추고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거짓으로 무고(誣告)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바람에 김방경은 홍다구에게 고문을 받고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쿠빌라이 앞에서 결백을 증언하여 풀려났다.

심한 폭풍으로 왜국정벌에 실패한 쿠빌라이는 다시 왜국정벌에 나섰다.

제2차 왜국 정벌에서는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 흔도와 홍다구가 이끈 몽고군과 한(漢)군 등 총 5만 군대가 선발대로 출발했고, 범문호가 이끄는 남만군 10만이 후발대로 출발했다. 이들 연합군 15만은 다시 한번 왜국 본토를 공격하였으나 홍다구가 이끄는 몽고군이 크게 패하고 후발대로 도착한 범문호의 남만군 10만이 8월에 심한 폭풍을 만나 모두 수장되는 바람에 대패하고 말았다.

이 때 김방경의 뛰어난 통솔로 고려군의 피해는 비교적 적었으며, 밀물과 썰물에 밀려 떠다니는 남만군 10만의 시체가 합포의 포구를 가득 메웠다.

이렇듯 1,2차 원정에서 왜국군에 대패하자 쿠빌라이는 정동행성의 기능을 더욱 강화하여 왜국정벌에 혈안이 되었다. 이 때문에 고려는 막대한 물질적 피해와 노동력 상실을 입게 되어 누차에 걸쳐 왜국 정벌 계획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쿠빌라이는 1294년에 죽을 때까지 왜국정벌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죽자 원나라 내부에서 왜국정벌이 불가함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승상 왕택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왜국정벌 계획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왜국정벌을 위해 만들어졌던 정동행성은 여러 차례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다가 1299년부터는 고려와 원나라를 연결하는 교량적 기구로 변모되었고 공민왕 대에 가서야 비로소 타파되었다.

쿠빌라이가 그토록 왜국을 정벌하고자 했던 것은 쿠빌라이 스스로가 왜국에 보냈던 조서에서 밝힌 대로 후대에 이름을 남기기 위한 명예심 때문이었다.

1276년에 그동안 양자강을 버팀목으로 겨우 지탱하던 남송이 무너지자 동북아에서 왜국(일본)은 원나라에 조공을 바치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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