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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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09.18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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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쿠빌라이는 이 점이 마음에 걸려 끓임없이 왜국정벌을 추진했지만 해군력이 약한 몽고군으로서는 왜국정벌은 무리였다.

왜국(일본)은 이 때 자신들을 지켜준 태풍을 일러 ‘가미가제’ 즉 신풍(神風)이라고 불렀으며, 이 명칭은 그후 태평양전쟁 때 자살특공대의 이름으로 되살아났다.

왜국(일본) 정벌의 결정적인 참패로 원나라의 세계 통일의 야망은 사라졌고, 원나라의 전쟁준비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고려의 백성들은 고래 싸움에 세우 등 터지는 격이 되어 편안한 날이 없었다.

그러한 와중에 북방 야인들의 침입이 잦아 고려 사회는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다행이 김방경 등의 활약으로 이 같은 난국이 극복되어 가까스로 국운을 보존하게 되었다.

고려 백성들은 몽고가 침략하기 시작한 고종(高宗) 18년 이후 약 50년간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활하는 비운을 맛보았다. 이로 인하여 고려의 문화는 발전하지 못하였고, 민심 또한 편한 날이 없었다. 약소민족의 숙명적 치욕이었던 것이다.

(19)

몽고(蒙古)가 고려(高麗)를 굴복시킨 후 다시 등을 들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고려와의 국혼을 강요하게 되었다. 즉 원나라의 공주를 장차 고려국의 왕이 될 태자에게 시집 보내는 정책이었다.

고려의 원종(元宗)이 태자시설 원나라에 들어간 후, 왕의 된 후에도 여러 차례 원나라에 출입했으며, 왕이 못 갈 때는 왕 세자를 대신 보내는 일이 있었다. 이때 태자의 나이 30이 넘어 원나라에 출입하며 원나라 풍속을 알게 되었다. 원종 15년 5월에 세자와 원나라 공주간에 국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신록이 우거진 5월의 연경(燕京) 궁정에서는 고려의 세자는 몽고의 풍습대로 몽고 옷을 입고 제두변발한 채 몽고의 예복을 입었다. 초례 시간에 되자 몽고식 요란한 풍악이 울려 펴지는 가운데 새로 닩아한 공주가 시녀들에 둘러싸여 나왔다. 세자는 이국의 풍습을 구경하며 옆에서 시신(侍臣)들이 시키는 대로 예를 행하였다.

세자와 공주는 서로 이마가 맞닿을 정도로 가가이 서서 팔을 들어 길게 절 한 후 다시 같은 절을 두어 차례 반복했다. 요란한 음악이 장내를 울려 퍼진 가운데 결혼식이 끝나고 세자는 공주를 한번 번쩍 들었다 놓았다. 이것은 환영을 한다는 뜻으로 고려 풍속의 친영(親迎)예와 같은 것이다.

밤이 되자 신방을 차리게 되었다. 공주의 침전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으며, 황색 밀초에 달아 놓은 촛불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침상에는 비단으로 수놓은 원앙금침이 깔려 있었다. 공주는 시녀 두 사람의 부액을 받으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어 들어왔다.

낮에는 여러 사람의 시선 때문에 공주를 똑똑하게 바라볼 수가 없었지만 이제 방 안에서 공주를 자세히 대하고 보니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시녀들이 몽고말로 무엇이라고 말하고 생글생글 웃으며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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