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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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0.2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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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충혜왕은 정순숙의공주, 희비 윤씨, 화비 홍씨, 은천옹주 임씨 등 4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그들 중 정순숙의공주(덕녕공주)가 충목왕과 장년공주를 희비 윤씨가 충정왕을, 은촌옹주가 석시기를 낳아 3남 1녀를 얻었다.

정순숙의공주 역련진반은 원나라 진서 무정왕 초팔의 딸이다. 그녀는 1330년에 충혜왕에게 시집왔으며, 덕녕공주에 책봉되었다.

충혜왕(忠惠王)의 패륜 행위로 말미암아 마음 고생이 심했으며, 충혜왕이 죽고 난 뒤에는 여덟 살밖에 안 된 충목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보살폈다. 이 때 배전, 강윤충 등과 친하게 지냈고, 그들은 공주의 총애를 믿고 권세를 부렸다.

그 후 충목왕(忠穆王)이 병약하여 드러눕자 밀직부사 안목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정사를 보았다. 1348년 12월에 충목왕이 죽자 덕성부원군 기철과 정승 왕후에게 정동성의 업무를 대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희비 윤씨의 아들 충정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도 정사에 대한 간섭을 심하게 하였다. 그후 1350년에 원나라에 갔다가 시동생인 공민왕이 즉위한 후인 1354년에 귀국하였다. 공민왕 대에도 그녀(윤씨)는 왕후나 태후 못지않은 좋은 대우를 받았으며, 1367년에는 원나라로부터 정순숙의공주에 봉해졌다. 그리고 1375년에 사망하여 경릉에 묻혔다. 그녀의 소생으로는 충목왕과 장녕옹주가 있었다.

희비 윤씨는 파평현 사람으로 찬성사 윤계종의 딸이다. 1331년 충혜왕에게 시집와 입궁하였으며, 정순공주에 봉해졌다. 이 때 충혜왕은 부를 세워 경순이라 하고 승(丞), 주부 각 1명과 사인 2명을 두었다. 1348년 아들 충정왕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지만 희비 윤씨는 덕녕공주의 힘에 밀려 섭정을 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1351년 충정왕이 쫓겨나 강화에 머물 때 그녀는 공민왕에게 청하여 강화로 가서 아들을 만나보고 수일간 체류한 후에 개경(開京)으로 돌아왔다. 그 후 오랫동안 고독한 여생을 보내다가 1380년에 사망하였다. 소생은 충정왕 하나뿐이었다.

희비 홍씨는 평리 홍탁의 딸이다. 홍탁은 경상도 진변사로 있었는데, 충혜왕이 그의 딸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1342년에 궁중으로 맞아들이지도 않고 그녀를 회비에 봉했다.

그후 그녀는 재상 윤침의 집에서 기거하였는데, 충혜왕은 며칠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 싫증을 내고 출입을 끊어버렸다. 소생은 없었다.

은천옹주 임씨는 상인 임신의 딸이며, 단양대군 왕유의 종이었다. 오지그릇(사기)을 파는 것을 생업으로 하고 있던 그녀는 어느 날 충혜왕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1342년 충혜왕이 회비 홍씨를 후비로 맞아들이려하자 그녀는 질투하여 이를 저지하려 하였다. 이에 충혜왕이 그녀를 달래기 위해 은천옹주에 봉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녀를 가리켜 ‘오지옹주’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녀가 오지그릇을 팔던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무척 음탕하여 성욕이 강한 충혜왕과 죽이 잘 맞았으며, 사치가 심하여 충혜왕으로 하여금 새로운 궁궐을 짓도록 하고 자신이 거처하였다.

충혜왕이 이른바 열약이라는 정력제를 먹어 다른 비빈들이 성생활을 견뎌내지 못했는데, 유독 그녀만은 매일같이 성관계를 해도 견뎌냈다. 그러다 보니 충혜왕은 어느 후궁보다 홍씨를 아끼고 총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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