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상태바
[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0.28 18: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22.

이 소식이 전해지자 초조하게 왕자를 기다리던 조정 대신들은 만세를 부르며 왕자의 탄생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 소식은 온 나라안에 퍼져 백성들도 기뻐하였다.

공민왕 14년 2월, 노국공주는 분만하기 위해 산전(産殿)으로 들어갔다. 왕은 대사령을 내리는 한편, 각 사찰에 불공을 드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왕의 간곡한 기대와 명산대찰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노국공주는 난산(難産) 끝에 세상을 떠났다.

왕(공민왕)의 슬픔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왕의 슬픔을 보다못한 최영(崔瑩)은 왕에게

“전하! 다른 궁궐로 옥체를 옮기시옵소서. 애통이 지나치시니 성체(聖體)에 이상이 생길까 염려되옵나이다”

하며 간곡히 상주하였다. 그러자 왕(공민왕)은

“나는 언제나 같이 있기로 공주와 약속했소. 여길 떠나고 싶지 않소”

하였다.

왕(공민왕)은 슬픔을 억제치 못하였으며, 철조 3일을 명령하고, 4도감과 13색(色)을 만들도록 명령하여, 노국공주의 마지막 가는 길을 소흘함이 없도록 조치하였다.

특히 왕(공민왕)은 불교를 신봉하였으므로, 사찰에 명령을 내려 불공을 잘 드리라 하였고, 7일마다 큰 재를 올려 노국공주의 명복을 빌었다.

장삿날에는 장례행렬이 대궐을 출발하면서 노국공주의 정릉(正陵)까지 반개(磻蓋)와 당(幢), 기치(旗幟)가 하늘을 가렸고, 바라와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노국공주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기 위해 거리에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고, 백성들은 장례행렬이 지나가는 길 옆에 엎드려 한결같이 노국공주의 죽음을 애통해 하였다.

왕(공민왕)은 친히 노국공주의 화상을 보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3년간이나 육식(肉食)을 금하고 국가의 중대한 일이 있을 때는 모두 정릉(正陵)에 가서 배제토록 하였다.

공민왕 15년에는 왕륜사 동쪽에 노국공주의 영전을 짓도록 하였는데, 이 영전을 짓기 위해 목재를 운반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으며, 노국공주의 장례식 이후에도 국고가 탕진돼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부족하여 왕(공민왕)은 정릉 앞 정자각에서 군신들을 모아놓고 밤새도록 원나라 음악을 연주하여 노국공주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