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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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1.05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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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기씨 형제들이 이처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자 그의 친척들도 덩달아 거만해졌고, 권력을 휘두려며 횡포를 일삼았다. 또 기씨 형제와 왕실 간에 다툼도 자주 일어났다.

충혜왕이 기씨의 친척이자 전자 유씨 처(妻) 이씨를 강간하여 전자 유씨 이씨를 데리고 도망친 일도 있었고, 기철의 막내 동생 기륜이 내료 등촉배를 구타하여 충혜왕을 분노케 하여 쫓겨다닌 일도 있었다.

또 기철 매부 염돈소가 무뢰배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남의 유부녀를 강간하다가 충혜왕의 분노를 사서 남해의 섬으로 귀양가기도 했다.

공민왕은 기철의 거만한 행동을 몹시 증오했다. 기철은 곧잘 공민왕과 함께 말을 나란히 하여 움직이곤 하였는데 이 때마다 공민왕은 호위군사들에게 명령하여 기철을 자기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였다.

하지만 기철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왕과 나란히 앉는 행동을 일삼아 신하들의 빈축을 사기도 하였다.

기철의 행동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또 있었는데, 그가 바로 조일신이다. 조일신은 스스로 공민왕의 보필자임을 자칭하며 거만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자주 기철 일파와 부딪쳤다. 그러자 조일신은 급기야 기철 일파를 숙청하기 위해 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기철의 세력은 전과 같지 않았다. 즉위 초부터 개혁과 국권회복 운동을 전개하던 공민왕은 조일신의 반란 이후에 더옥 강하게 배원정책(背元政策)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공민왕의 배원정책은 곧 친원(親元) 세력인 기씨 일파의 숙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위기의식을 느낀 기철은 권겸, 노정, 박양 등과 모의하여 공민왕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기철은 원나라의 쌍성총관부 소속 군사들을 동원하는 한편 자신의 딸들을 원나라에 바친 권겸, 노정, 박양 등의 친원 세력의 도움을 받아 공민왕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철의 계획은 쌍성총관부의 천호로 있던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이 1355년에 고려에 내조함에 따라 난관에 부딪쳤다.

그리고 기철의 반란계획을 눈치 챈 공민왕이 1355년 3월에 이자춘을 불러 쌍성의 유민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부탁한 다음, 5월에 남양후 홍언박으로 하여금 기철, 권겸, 노정, 박양 등을 체포하게 하여 처단함으로써 기철의 반란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기철 일파는 완전히 몰락하였다.

이 사건이 종결되자 공민왕은 곧 정동행중서성이문서를 철폐하고 쌍성을 수복하여 서북면과 동북면 일대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공민왕의 정치개혁은 몰락해가는 원나라에 대한 배척운동과 함께 실시되었다. 1352년 고려 풍속을 회복하기 위해 변발과 호복(胡服) 등의 몽고 풍속을 금지시켰으며, 1356년에는 원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관제를 문종 대의 제도에 맞춰 복구하였다.

또한 내정간섭을 일삼아 오던 정동행중서성이문소를 철폐하고, 원나라 왕실에 의지하여 권세를 부리던 기왕후의 오빠 기철을 숙청했다. 그리고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을 은밀히 불러 이렇게 말했다.

“지금 원나라는 갈수록 국력이 쇠퇴해지고 있소이다. 이 기회에 원나라에 빼앗겼던 서북면과 동북면 일대의 우리 땅을 되찾아 주기 바라오. 혹여 원나라와 전쟁을 치루는 일이 있더라도 이번 기회에 원나라에 빼앗겼던 땅을 반드시 찾아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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