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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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1.07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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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이에 원나라는 쌍성과 삼살 이북에 대한 왕래를 자유롭게 할 것을 요청했지만 고려는 그곳이 원래 고려 땅이라고 주장하며 거부했다.

그러나 중국 하북성 일대에서 일어난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어려움에 빠져들자 원나라와 화해하고 유대관계를 강호하는 등 다시금 친원정책(親元政策)으로 돌아섰다.

1355년 국호를 송(宋)이라고 하고, 허난성, 산서성 등지로 세력을 확장한 홍건적은 부분적으로 만주지역으로 북진하여 요동을 점령하고 원나라를 위협하다가 원나라의 반격이 시작되자 쫓기어 뱡향을 돌려 고려를 침입하였다.

이에 고려는 1357년 김득배를 서북면홍두군왜적방어도지휘사로 삼아 홍건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359년 모거정이 이끄는 4만 명의 홍건적은 압록강을 고려에 공격해 왔다.

고려군은 초전(初戰)에는 철주와 서경이 함락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이듬 해 2월에 2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홍건적을 압록강 이북으로 몰아냈다. 그러나 홍건적은 해상을 통해 풍주, 봉주, 황주, 안주 등의 해안 지방의 백성들을 괴롭혔다.

그리고 1361년 10월에는 홍건적의 장수인 반성, 사유, 주원수 등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다시 대대적인 제2차 침입을 감행하였다.

홍건적의 제2차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은 경기도 광주를 거쳐 안동으로 몽진(蒙塵)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1월 고려군 20만이 홍건적을 반격하여 적장 관선생과 사유 등을 죽이고 개경을 회복한 후 홍건적을 압록강 이북으로 쫓아냄으로써 고려는 가까스로 위기을 모면하였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의 궁성이 완전히 불에 타고 각 도의 문화재와 사찰이 불에 소실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어 공민왕은 한동안 죽주, 진천 등에서 행궁생활을 하였다.

또한 홍건적의 침입으로 원나라와 연합할 필요성을 느낀 고려 조정은 그동안 꾸준히 추진하던 배원정책(背元政策)을 포기하고 1361년에는 정동행성을 다시 설치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관제도 개혁이전 상태로 돌려 놓았다.

홍건적의 피해가 미처 복구되지 못해 왕이 아직 개경에 입성하지 못하고 있던 1363년 윤3월에 찬성사 김용(金庸)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고려 조정은 또 한번 위기를 맞았다. 이 사건으로 환자 안도적, 첨의평리 왕자문 판전교지사 김한룡, 우정승 홍언박 등이 목숨을 잃고 공민왕도 살해될 뻔하였으나 안도적이 왕을 가로막고 필사적으로 싸우는 동안 왕은 그 사이 몸을 피해 공민왕은 가까스로 살아났다.

반란의 주모자 김용(金庸)은 안성 사람으로 성질이 음흉하고 능청스러워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었다.

또한 오만하고 가식(假飾)이 많아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피해를 주고, 약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김용(金庸)이 출세하게 된 것은 공민왕이 왕자의 신분으로 원나라에 입조해 있을 때 시종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이 여러 관직을 거쳐 대호군에 이르렀고, 공민왕이 즉위한 이후에는 응양군 상호군 벼슬에 올랐다.

이 무렵 원나라에 승상 탈탈이 공민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김용(金庸)의 인품이 간사하고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벼슬을 주지 말 것을 권고하였는데, 이 때 조일신과 최덕림이 사신을 매수하여 반주 김용(金庸)과 승지 유숙, 김득배 등이 왕의 근신으로 국정을 농락한다고 말하도록 꾸몄다. 그 바람에 유숙과 김득배는 파면되었으나 정작 김용(金庸)은 공민왕의 신망으로 파면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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