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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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 권우상
  • 승인 2019.11.20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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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이러한 사실을 아는 간상배들은 벼슬자리나 기타 이권을 얻기 위해 신돈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기현(奇顯)에게 통하고 다시 기현의 처(妻)를 거쳐야만 뜻을 이룰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기현의 처소에는 늘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하지만 공민왕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1370년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보낸 친서에는 공민왕을 고려 국왕이라 칭하고 신돈을 상부로 만큼 신돈의 권세는 왕 못지않게 대단하였다.

하지만 신돈의 세력 확대는 공민왕에게도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권문세가들을 견제하기 위해 내세운 신돈의 권력이 왕권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공민왕이 신돈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선부의랑 이인(李靭)은 야음을 틈타 김속명(金續命)의 처소로 들어가 익명으로 신돈의 역모를 고변하였다.

김속명(金續命)은 즉시 왕에게 상주하자 왕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으나 그대로 둘 수가 없어 신돈의 무리인 기현, 최사원, 정구한, 진유검, 기종수 등을 국문한 결과 신돈의 역모가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왕은 신돈의 일당을 모두 죽여 버렸다.

그리고 신돈을 수원으로 유배시킨 후 사형에 처했다. 이 때가 1371년 7월이었고, 이로써 6년간 계속되던 신돈의 정권은 종말을 고하였다.

(22)

신돈이 죽은 후 왕은 수시중(守侍中) 이인임(李仁任)을 신임하게 되었다.

“이시중, 나는 이제 죽어도 한이 없소”

이인임은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몰랐다.

“전하 춘추 아직 전성하시온데 무슨 일로 이 같이 황공한 말씀을 하시나이까”

“이시중, 궁중에 혜비, 익비, 정비, 신비 등이 있으나 후사가 없어 항시 걱정하였소”

“황공하여이다”

“이시중, 내 말을 잘 듣소. 전번 신돈의 집에 출입하다가 한 여자를 가까이 하여 그 몸에서모니노(牟尼奴)라는 아이를 낳았소. 내거 불교를 믿다가 낳은 아이인 까닭에 모니노라고 이름지었소. 내가 죽은 후에 잘 보살펴 주도록 하시오”

“망극하여이다. 어의(御醫)를 받들어 모시겠사옵니다”

이로 인하여 모니노(牟尼奴)는 궁중으로 들어와 명덕태후가 기르게 하였다.

신돈이 제거된 후 공민왕의 행동은 많이 변했다. 즉위 초의 정치개혁적인 성향은 거의 없어지고 자주 술에 취해 있거나 노국공주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여 혼자 미행을 나가는 일이 잦았다.

공민왕은 원래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항상 노국공주에 대한 생각에 집착하여 급기야 정신병적인 증세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공민왕은 변태적인 행동을 자주 하였는데 젊은 예쁜 시녀들을 방안으로 불러들여 귀족의 아들로 구성된 자제위 소속 김흥경, 홍륜 등과 난삽한 음행을 하도록 하고 자신은 문틈으로 그것을 엿보곤 하였다.

또 마음이 동하면 홍륜 들을 자기 침실로 불러들여 동성연애를 하였으며, 후계자가 없음을 염려하여 나이 젊고 잘 생긴 미남자를 골라 왕의 좌우에서 시중들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곧 자제위(子弟衛)이다. 이 자제위들은 항상 왕의 친전에서 일하고 기거하였다.

이 풍습은 몽고에서 들어온 풍속으로 소위 용양(龍陽)이란 것으로 지금 말로 말하면 동성애(同姓愛)란 것이다. 일찌기 충선왕 때부터 이 풍습이 유행하였으며, 이 자제위들이 용양(龍陽 : 동성애)의 대상자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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