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다라국의 후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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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다라국의 후예들
  • 권우상
  • 승인 2020.07.24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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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걸손국(구주) 이소지왕을 참살하고 왕권을 탈취한 이도서(伊悼徐)에 대한 복수심으로 신라가 임라국(대마도)을 친 후 그 여세를 몰아 걸손국(구주)을 치도록 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탈해왕은 일모(日侔 : 히호고)를 임라국 정벌군의 총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일모(日侔)는 정벌군을 전군, 후군으로 편성하고 각 군은 15만 명씩으로 하였는데, 총 병력은 30만명으로 전군은 창검대, 후군은 궁사대로 하고 창검대는 창과 칼로, 궁사대(弓士隊)는 활로, 무장했다. 전군의 지휘관은 다라국 거우위왕의 왕자였던 거불연이 맡았다. 임라국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

대마정벌 코스는 우산(울릉도)으로 가서 무릉(독도)을 거쳐 대마도로 간다는 계획이었다. 우산(을릉도)과 무릉(독도)에 왜구가 자주 출몰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기 때문에 이 두 섬이 조선의 영토임을 확실하게 하는 동시에 왜구가 발을부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때가 탈해왕 즉위 12년 5월이었다. 신라 정벌군은 병선 100여 척에 나누어 타고 우산(울릉도)을 지나 무릉(독도)을 거쳐 대마도로 향했다. 전군이 먼저 대마도에 상륙하자, 대마도주 모야(毛野)는 무사들을 긴급히 소집하여 신라군에 맞서 싸웠다.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죽고 죽이는 싸움은 상당히 오랜 시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신라군의 거센 공격에 왜구들은 많은 희생자를 냈다. 하지만 왜구들은 필사적으로 신라군에게 저항했다. 그러나 신라의 후군이 상륙하고, 신라의 병력이 늘어나자 왜구들의 희생이 갈수록 늘어났다. 후군이 상륙하면서 먼 거리에서 수 만발의 화살이 날아오자 왜구의 희생자가 많은데다가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임라국(대마도)의 영주 모야는 결국 신라군에게 항복했다. 임라국 영주 모야(毛野 : 모리노)는 임라국(대마도)을 신라의 영토로 복속하겠다는 서약을 했지만 일모(日侔 : 히호고)는 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한 나머지 모야(모리노)와 그의 측근 장수들을 모조리 목을 베어 죽였다. 이렇게 해서 임라국(대마도)는 명실공히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신라 정벌군의 총지휘관 일모(히호고)는 그 여세를 몰아 다시 걸손국(구주) 상륙을 노렸다. 그러나 폭풍이 몰아쳐 걸손국 공격은 좌절되었다.

탈해왕은 임라국(대마도) 정벌에 성공하고 돌아온 일모(日侔 : 히호고)를 비롯하여 거불연(巨不練) 등 여러 장수와 병졸들에게 치하하고 잔치를 베풀어 이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그리고 임라국(대마도)를 신라에 편입시켜 거불연을 영주로 임명하여 임라국(대마도)을 통치하도록 하였다. 또한 다라국의 왕이었던 거우위왕(巨優位王)은 대보(벼슬)에 임명하여 다라국의 영토였던 합천지역을 통치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우산(을릉도)과 무릉(독도), 그리고 임라국(대마도)를 포함하여 가라국(김해). 아라국(함안). 사이기국(의령). 다라국(합천) 탁순국(졸마국 : 진해) 고차국(고성) 자타국(창녕) 산반하국(진주) 등 모든 지역으로 국토가 넓어졌다.

다라국(多羅國)이 인마십국 중에서 가장 강성한 이유는 일찍이 군사력 강화를 위해 칼, 창, 철갑옷, 투구, 편자(말굽) 등 전쟁무기를 비롯하여 농기구 등 일찍이 철기문화가 발달했기 때문이었다. 다라국이 신라에 합쳐지면서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 등 여러 나라로 나누어지더니 가야가 신라에 합쳐지면서 한반도는 신라, 고구려, 백제의 삼국으로 나누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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