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다라국의 후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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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다라국의 후예들
  • 권우상
  • 승인 2020.07.28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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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신라」라는 말을 새로운 가라(加羅)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해서 가라국은 안라(安羅 : 경남 함안)을 본거로 한반도의 남부지역 일대와 바다 건너서는 일본열도의 서남부 전역을 포괄하는 큰 나라가 되었고, 가라국왕 아라사의 아들 천일창(天日槍)은 그곳 신라의 국왕이 되었고, 한반도 남부지역의 가라국과 일본열도의 신라를 포괄하여 대가라국(大加羅國)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대가라국 왕자를 임라왕이라고 호칭했는데 이름은 기능말다간기(己能末多干岐)라 하였다. 간기(干岐)는 군왕(君王)을 지칭하는 한국 고어이고 말다(末多)는 아라사 등의 이명(異名)인 ‘마다’ 계(系)의 이름인 것이다. 마다는 한국 고어로 크다는 뜻이다. 아라사왕의 또 다른 이름은 대오(大俣)인데 대오왕에게는 서립왕(曙立王)과 면상왕(冕上王)이 있었다.

이처럼 일본열도에서 가야국의 세력이 강해지자 나라국(那良國)은 가야국을 칠 필요성이 대두되자 나라국 조정에서는 가야국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왜(倭)의 가야국 영토는 대우반도(大隅半島)의 녹록시(鹿屋市)와 근강지역(近江地域)의 문야(蚊野). 신농(信濃), 과야(科野) 지역에 있었고, 아기스다왕(秋津田王)이 다스리고 있었다.

병력 1만5천의 나라군이 가야국 국경에 도착하자 가야국 아기스다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방어전에 나섰다. 그러나 가야국의 병력은 4천3백으로 나라군의 병력에 비해 절반 수준에도 못미쳤다. 게다가 나라군은 대다수가 기마병이었다. 나라국 장수 겐지사부로(建支三郞)가 이끄는 제1진 기마병이 가야군을 향해 달려 나갔고 다시 그 뒤를 이어 보병이 와! 하는 함성을 지르며 적진을 향해 달려 나갔다. 말발굽에서는 뽀얀 먼지가 구름처럼 일었다. 가야국 아기스다왕(秋津田王)도 기마병을 이끌고 나라백제군을 맞아 싸웠다. 전투가 시작되면서 양쪽 군사들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칼과 칼이 부딪치고 양쪽 진영의 군사들이 격돌하면서 군사들은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라군(奈良軍)의 장수 겐지사부로는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가야군을 향해 칼을 힘껏 내리쳤다. 군사의 피가 솟구치면서 장수들의 몸을 붉게 물들었다. 피차간 악귀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싸움은 시간이 갈수록 사상자가 속출하면서 가야국에 불리했다. 가야국은 사상자가 점점 늘어나 더 이상 싸울 군사가 없었다. 많은 희생자를 낸 가야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결국 가야국 아기스다왕(秋津田王)은 나라군의 장군 젠지사부로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하였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군은 일본열도에 있는 가야국 영토를 차지하여 나라국 영토는 대우반도(大隅半島)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나라국을 통치하던 거불연왕이 죽고 그의 아들 거진부(巨眞夫)가 천황에 오르면서 나라국은 더욱 강해졌다. 그후 한반도에서는 백제가 신라의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백제의 왕족과 유민들이 대거 일본 열도에 들어와 나라국 백성이 되었다. 그후 나라국에 백제유민이 대거 몰려오면서 조정에서는 국호를 나라백제로 개칭했다. 조정에는 백제의 지배계급과 유민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라백제의 국력이 강해지자 일본 열도에 분산된 많은 소왕국을 정복하여 하나의 국가로 건설하였다. 그리고 국호를 일본이라고 하였다. 이때가 697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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