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역사소설] 第七의 王國

2019-11-13     권우상

232.

최유는 동지밀직을 지낸 최안도의 아들이며, 몽고식 이름은 첨목아불화다. 최유는 충혜왕때 여러 관직을 거쳐 군부판서로 근무했을 때 재신 조분의 처(妻) 마씨가 과부가 되자 상복도 벗기 전에 강간을 하여 조분의 동생에 의해 어사대에 고발당했다.

이 때문에 최유는 심한 국문을 당했으나 어사대 관리들에게 뇌물을 써서 곤장 50대를 맞고 방면되었다. 그 후에도 해평부원군 윤석의 며느리를 강간하는 등 행실이 좋지 못했고, 이 때문에 지도첨의에 올라 있던 최유는 파면되고 말았다.

그러나 평리 벼슬에 있는 이한박의 중재로 충정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 와서는 왕의 즉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취성군에 봉해지고 참리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 그때부터 최유는 대신들과 곧잘 말다툼을 벌리곤 하여 배전, 민사평을 구타하였다. 이 때문에 감찰사가 최유를 탄핵하고 수하들을 시켜 최유 대신 그의 여종을 데리고 간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최유의 동생 최원은 국문중에

“정승은 황제의 숙위에게 모욕도 못하고 국문도 못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하면서 옥문을 빠져나가 버렸다. 이렇게 되자 최유는 더 이상 고려에 머물 입장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아우 최원을 따라 원나라로 갔다.

원나라로 간 최유는 그곳에서 어사 벼슬을 하다가 공민왕이 즉위할 무렵 왕을 호종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려로 돌어오는 중 요양에서 몰래 도망하여 원나라로 되돌아갔다. 원나라로 되돌아간 최유는 고려에 앙심을 품고 김원지, 이상화와 함께 원나라 왕 순제에게 남방 정벌군 10만 명을 고려에서 징발해야 한다고 청원하였다.

그래서 원나라 왕 순제는 최유를 고려 조정에 보내 지원군 10만 명을 징발하게 하였다. 하지만 고려 조정의 거부로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하지만 최유는 포기하지 않았다. 원나라 왕 순제가 난적들을 정벌할 때 최유는 원나라 중상감승 자격으로 고려에 와서 군사를 독촉하고 창과 화살을 만들 재료를 요구하였다. 이 때문에 공민왕은 최유를 달래기 위해 삼사사 벼슬을 내라고 용성부원군의 작호를 주었다.

그런데 그 후 고려에서 기철을 제거하는 등 친원(親元) 세력들을 대거 축출하자 원나라 왕 순제의 제비(弟妃) 기왕후는 오빠의 원수를 갚은 것을 다짐하고 이를 위해 엄밀하게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이를 눈치 챈 최유는 기왕후를 설득하여 공민왕을 폐위하고 원나라에 와 있던 덕흥군 왕례를 고려 국왕으로 세울 것을 주청했다.

이 무렵 고려는 홍건적의 침입으로 온 나라가 벌집 쓰려놓은 듯 시끌법적하면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고, 거기다 김용(金庸)의 반란 사건이 일어나 조정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최유는 이것을 기회로 공민왕은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최유는 기왕후와 공모하여 홍건적의 침입 때 국인(國印)을 잃어버려 자체적으로 만든 국인을 사용하고 있다고 거짓 보고를 하였다. 이에 원나라 왕 순제는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고려 국왕에 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