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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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 권우상
  • 승인 2018.08.06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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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회

진사왕은 진씨세력을 등에 업고 조카를 대신하여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대륙백제 조정에서는 진씨세력과 신진세력들 간에 왕위 계승문제로 내분을 겪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고구려는 대륙백제 침략을 위해 병력을 강화했고, 고구려의 침략을 염려한 진사왕은 즉위 이듬해인 380년 봄, 15세 이상의 장정들을 대대적으로 징발하여 대륙의 청목령에서 팔곤성을 거쳐 황해에 이르는 방어벽을 설치하였다.

그해 8월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예상대로 2만의 병력으로 대륙백제를 침공했지만 대륙백제군의 반격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진사왕은 고구려의 재차 침입을 예상하고 달솔(達率) 진가모(眞嘉謨)와 은솔(恩率) 해두진(解豆辰)에게 명령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자 387년 9월에 말갈군이 쳐들어 왔다. 말갈은 고이왕 이래 화친을 맺고 130여년 동안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고구려의 압력을 받고 갑자기 대륙백제를 친 것이었다. 기동력이 뛰어나고 산악전에 능한 말갈군의 개입은 대륙백제에게는 치명타였다.

관미성(關彌城 : 교동도) 전투에서 대륙백제군은 말갈군에게 패해 물러났고, 이 때문에 대륙백제군은 수세에 몰렸지만 진사왕은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재위 5년(389년) 9월에 대륙에서 고구려 남쪽을 공격하여 유린하는 한편 390년 9월에는 장수 진가모(眞加謨)를 앞세워 고구려 도곤성을 함락시켰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 300여 명을 포로로 잡았고, 그 공로는 장수 진가모(眞嘉謨)는 병관좌평에 오르는 영광을 얻었다.

도곤성을 얻은 백제 진사왕은 모처럼 여유를 부리며 사냥을 다니고 궁실을 증수하는 등 호사를 부렸다. 증수한 궁실에는 새로운 연못도 만들고 동산도 꾸며 그 곳에 진귀한 새를 기르고 기이한 화초를 가꾸기도 하면서 호화스런 생활을 누렸다. 이런 일로 391년 4월에 말갈군이 적현성을 기습하여 함락되었지만 진사왕은 여전히 사냥을 다니기에만 바빴다. 이런 진사왕의 행동은 조정 대신들의 불만으로 이어졌고, 왕을 교체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이런 첩보를 입수한 고구려 광개토왕은 392년 3월 4만의 대군을 이끌고 대륙백제 북쪽지역(하북성)을 공격했다. 이때도 진사왕은 여전히 사냥을 나가고 궁궐에 없었다. 대륙백제군과 고구려군의 치열한 전투가 불붙기 시작하면서 두 나라 군사들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고구려의 4만 대군과 싸우는 3만의 대륙백제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열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비오듯 날아오는 고구려군의 화살은 대륙백제 진영에 떨어졌고, 고구려 장수들이 휘두르는 칼날이 햇볕에 섬광처럼 번쩍거리면서 대륙백제군의 머리는 추풍낙엽처럼 땅에 떨어졌다. 고구려에서도 이 싸움이 매우 중대하다는 것을 알고 광개토왕이 친히 대군을 지휘하였다. 대륙백제군은 필사적으로 화살을 쏘고 장창을 휘두르며 고구려군과 맞서 싸웠으나 아무래도 고구려군을 이기기에는 힘이 부치었다. 사기가 충천한 고구려군은 질풍노도와 같이 대륙백제군을 참살하였다.

두 나라 군사들의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대륙백제군의 사상자가 늘어나면서 대륙백제군의 사기는 떨어졌고, 고구려의 대군 앞에 대륙백제군은 무력하게 무너졌다. 20여일을 싸우면서 대륙백제의 10개 성이 고구려군에게 함락되었고, 대륙백제의 요새인 관미성(關彌城)이 무너졌다. 관미성은 사방이 높은 절벽이고 바다에 둘러싸인 천혜 요새로서 대륙백제의 황하이북 지역의 최대 거점으로 대륙백제의 요서군에 속한 땅이라 고구려군에 패한 대륙백제의 영토는 황하 이남의 산동지역으로 축소되었고, 이런 요충지를 상실한 것은 대륙백제로서는 엄청난 손실이었다.

고구려 광개토왕이 관미성을 공격하고 있는 동안 백제의 진사왕은 사냥을 나가 열흘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자, 백제군과 장수들은 물론 조정 대신들까지도 격분을 자아내면서 진사왕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병관자평 진가모(眞加謨)는 수하 장수를 보내어 진사왕을 죽이라고 하자 장수 사진충(沙辰忠)은 군사를 거느리고 사냥터로 달려가 백마하(白馬河) 주변 구원군(九原郡)의 행궁(行宮)에서 쉬고 있던 진사왕의 목을 칼로 베었다. 이때가 392년 11월(즉위 7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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