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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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 권우상
  • 승인 2018.08.07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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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3

백제는 진사왕이 죽고 그 뒤를 이어 등극한 아신왕(阿莘王)은 침류왕의 맏아들이며 진사왕의 조카이다. 385년 부왕이 죽었을 때 그는 너무 어려 사촌인 진사왕에게 왕위를 넘겨줘야 했다. 아신왕은 즉위하자마자 중국대륙에서 고구려에게 빼앗긴 관미성 탈환에 나섰다. 재위 2년(393년) 정월에 아신왕은 외삼촌인 진무(眞茂)를 병관좌평에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모든 업무를 맡겼다.

그리고 아신왕은 그해 8월에 장수 진무(眞茂)에게 기마병 1만과 보병 5천을 주어 관미성(關彌城) 탈환을 지시했다. 출정에 앞서 아신왕은 군사들을 사열하는 자리에서 장수 진무(眞茂)에게 용검(龍劍)을 하사하고 반드시 관미성을 되찾아 오기를 당부하면서 군사들에게 말했다.

“관미성은 우리 대륙백제의 북변 요세이다. 그 땅을 지금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다. 과인은 이것이 너무나 분하고 원통하니 그대들은 응당 여기에 노력을 기울어 고구려에 빼앗긴 땅을 반드시 찾아서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

군사들은 창칼을 높이 치켜들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전투에 승리할 것을 다짐했다. 진무(眞茂) 장수는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아신왕에게 나아가 용검을 두 손에 받쳐들고

“신 진무는 폐하의 명을 받들어 반드시 관미성을 되찾아 올 것을 맹세하옵니다.”

하면서 승리를 다짐했다. 그리고 장수 진무는 기마병 6천과 보병 4천의 군사를 이끌고 관미성 전투에 나갔다. 장수 진무(眞茂)는 군사들의 선두에 서서 화살과 돌이 날아오는 위험을 무릅쓰고 석현(石縣), 비암(批岩), 등 다섯 성을 회복하기 위해 관미성(關彌城)을 포위하고 맹열한 공격을 퍼부었다. 대륙백제군의 화살은 고구려군을 향해 새떼처럼 까맣게 날아갔고 또한 대륙백제군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고구려군의 화살도 비오듯 쏟아졌다.

대륙백제군은 한 달동안 계속 공격했지만 관미성은 좀처럼 무너지지 않았다. 이 전쟁에서 대륙백제 장수 진무(眞茂)는 군수품 수송로를 확보하지 못해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결국 대륙백제군은 고구려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한 달여만에 퇴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신왕은 이듬해인 394년 7월에 장수 진무(眞戊)에게 1만 5천만의 병력으로 다시 관미성(關彌城) 탈환전에 나섰지만 수곡성(水谷城) 전투에서 고구려 광개토왕이 이끄는 5천의 병력과 치열한 전투를 벌리다가 대륙백제군은 대패하여 퇴각했다.

수곡성(水谷城)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에도 백제 아신왕은 중국대륙에서의 영토회복의 뜻을 버리지 않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대륙백제군의 잦은 공격으로 고구려 광개토왕은 관미성 주변에 7개의 성을 쌓아 대륙백제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395년 8월 아신왕은 장수 진무(眞茂)에게 3만 5천의 기마병과 5천의 보병을 합하여 총 4만의 병력으로 다시 고구려를 칠 것을 명령했다. 특히 아신왕은 이 전쟁에 사활을 걸었다.

장수 진무(眞茂)가 이끄는 4만의 대륙백제군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패수(浿水 : 산동성에 있는 강. 지금의 소청하)에 도착하자 고구려에서는 광개토왕이 3만의 병력으로 패수(浿水)에 진을 치고 대륙백제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륙백제군에서는 강을 도하하기 위해 뗏목을 설치할 목재를 실은 우마차 600백여 대를 후방에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대륙백제군과 고구려군의 전투가 시작된지 이십여 일 만에 대륙백제군은 패수에 뗏목을 설치하여 도하(渡河)에 성공했다. 대륙백제군이 패수(浿水 ; 지금의 소청하))를 건너자 평양성 공격을 눈앞에 둔 고구려군은 다급하기 시작했다. 고구려군을 이끌고 있는 광개토왕은 대륙백제군이 비오듯 쏘아 보내는 화살을 맞으며 대륙백제군의 평양성 공격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며 혈전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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