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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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 권우상
  • 승인 2018.08.08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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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회

대륙백제군이 휘두르는 칼과 장창이 햇볕에 섬광처럼 번쩍거리면서 고구려군의 머리는 추풍낙엽처럼 땅에 떨어졌다. 대륙백제군이 패수(浿水)를 건넜다는 소식을 들은 고구려 광개토왕은 간담이 써늘했다. 그는 이번 전쟁만은 대륙백제 장수 진무(眞茂)의 전술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패수(浿水)는 중국대륙의 난하와 요동반도 사이에 있는 큰 강으로 이 강을 건너면 평양성(平壤城)까지는 멀지 않는 곳이라 고구려로서는 매우 급박한상황이었다.

고구려 광개토왕은 친히 7천의 병력을 이끌고 장수 진무(眞茂)가 거느린 대륙백제군과 맞서 싸웠다. 전투는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혈전이었다. 대륙백제군과 고구려군 두 나라 군사들의 사상자가 엄청나게 발생했다. 이 전쟁에서 대륙백제군은 고구려군에게 8천여 명의 병력을 잃었다. 거기다가 부상자도 수백여 명에 달했다. 하지만 대륙백제 장수 진무(眞茂)는 다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 평양성을 눈앞에 두고 고구려군에게 패한 대륙백제 장수 진무(眞茂)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통곡했다. 그리고 멀리

바라보이는 패수(敗水)를 보면서 이렇게 시(詩)를 읊었다.

浿水是水幾千年
패수의 물줄기는 몇 천년이었던가

幾月無私與爾流
그 많은 세월은 나와 같이 흘렀으니라

自古浮生從此老
자고로 떠도는 인생은 늙어만가나니

不如戰爭上芳州
이제 전쟁을 거두고 방주에 올라야 할 것이다.

이 전쟁에서 대륙백제군은 8천의 병력을 잃고 패(敗)하긴 했지만 4만의 병력에 비하면 큰 피해는 아니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광개토왕이 이끈 7천병력 중에 4천이 죽고 광개토왕의 정예군 7천중에 3천이 죽었다. 대륙백제 장수 진무(眞茂)는 고구려군에게 포로로 잡힌 2천여 명을 제외하고 생존한 3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귀환길에 올랐다. 백제 아신왕은 돌아온 장수 진무(眞茂)에게 전쟁의 노고를 치하했다.

백제 아신왕은 고구려군 포로를 모두 배에 태워 왜지(倭地)의 나라백제(奈良百濟)로 송치했다. 그리고 이들 포로는 나라백제(奈良百濟)의 군대에 편입시켰는데 나라백제군(奈良百濟軍)는 대장군 경부신(境部臣), 부장군 혜적신(橞積臣), 해사수(解沙修)의 지휘하에 있었다. 이들 장군은 나라백제의 동북쪽에 위치한 소왕국 오리도(仵浬跳) 국주(國主) 호우도(法道)를 항복받아 나라백제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아신왕이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적군을 왜지(倭地)의 나라백제(奈良百濟)로 송치하는 이유는 나라백제(奈良百濟)가 북해도까지 일본열도의 땅을 모두 정복하기 위해서는 막강한 병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무렵 일본열도 본주(本主)에 있는 갑문국(甲斐國) : 山利縣), 준하국(駿河國) : 駿河縣), 이두국(伊頭國 : 伊豆半島) 등 소왕국이 있었는데 이런 소왕국을 정복하자면 막강한 군대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대륙백제는 전쟁 포로를 왜지(倭地)의 나라백제(奈良百濟)로 보내고 있었는데 고구려, 신라, 흉노족, 선비족, 북위, 등 여러나라 포로들이 이미 나라백제군(奈良百濟軍)에 편입되어 있었다.

이런 가운데 나라백제군(奈良百濟軍)은 갑문국(甲斐國)에서 이두국(伊頭國)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일금곶(日金峠) 고개에서 갑문국(甲斐國) 군대와 싸워 승리하자 다시 충야(沖野 오끼노)에서 이두국(伊頭國) 군대와 싸워 국왕 이두(伊豆)를 참살하여 두 왕국은 나라백제(奈良百濟)의 영토에 들어갔다. 왜지(倭地)에는 백제 아신왕 이름을 아좌(阿佐)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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