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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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 권우상
  • 승인 2018.08.09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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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회

395년 11월 백제 아신왕은 중국대륙에서 고구려와의 패수(浿水)싸움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대륙의 한수(漢水)를 건너 청목령 아래에 진을 쳤다. 하지만 때 아닌 폭설이 내리고 흑한에 병졸들이 동상에 걸리면서 회군하고 말았다. 이렇듯 대륙백제가 끈질기게 관미성 공략에 나서자 고구려 광개토왕은 관미성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396년 수군 3만 6천 명을 병선에 나누어 태우고 바다를 통해 한수(漢水)의 하구(河口)로 진입하여 곧바로 관미성을 손안에 넣어 황하 이북의 대륙백제를 기습공격했다.

대륙백제는 고구려가 수군(水軍)을 동원하여 황해로 들어와 한수(漢水)하구(河口)로 진입하여 기습 공격해 올 줄은 미리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구려군의 기습은 대륙백제군을 당황시켰다. 고구려군은 한수(漢水) 북쪽에 상륙하여 단번에 한수(漢水) 이북의 58개성 700개 촌을 점령했고. 그 여세를 몰아 한수(漢水)를 도하하여 한성(漢城)으로 밀고 들어왔다.

한성(漢城)이 함락될 처기에 놓이자 백제 아신왕은 성문을 열고 나가 광개토왕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항복한 아신왕은 왕족과 대신 열 명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는 수모를 당했고, 울분을 이기지 못한 백제 아신왕은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그는 치욕을 회복하고 중국대륙에서 고구려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왜지(倭地)의 나라백제(奈良百濟)에 사신을 급파하여 왜왕(倭王) 응신천황(應神天皇)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자 응신천항(應神天皇)은 원군을 약속했고, 백제 아신왕은 이 약속을 지키도록 하기위해 397년 5월에 태자 영(映 : 진지왕)을 나라백제(奈良百濟)에 머물게 하여 대륙백제와 나라백제가 연합전선을 구축하는데 합의하였다.

아신왕의 가슴속에는 어떤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짊어진 빚을 갚는다는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그야말로 아신왕은 복수의 화신이 되어 전쟁준비에 광분했다. 아신왕은 일반 백성들에게까지도 활쏘기 연습을 시켰고 민가의 장정을 대대적으로 징발하고 매일같이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러자 백성은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대륙신라로 도망하기 일쑤였고, 이로 인해 호구가 현격하게 줄어든 현상이 나타났다.

이 무렵 대륙신라는 내물왕의 조카인 이찬 대서지의 아들(실성왕)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 두 나라는 군사동맹을 맺은 상태였다. 이렇게 되자 대륙백제는 왜지(倭地)의 나라백제(奈良百濟)와 가야(伽倻)를 끌어 들여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고구려에 대항할 움직임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륙백제 백성들이 대륙신라로 도망가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러자 백제 아신왕의 대륙신라에 대한 적재감은 더욱 깊어졌다.

399년 백제 아신왕은 왜지(倭地)의 나라백제(奈良百濟)와 가야(가야는 한반도 남쪽과 대마도를 비롯하여 일본열도 전역에 존재한다) 두 나라 연합군으로 하여금 고구려와 군사동맹을 맺은 한반도 신라를 기습공격하게 하였다. 그러자 한반도 신라는 순식간에 초토화 되어 위기에 물렸고, 신라 내물왕은 급히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한반도 신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한편 백제 아신왕은 대륙신라를 공격했다. 대륙백제에서는 목라근자(木羅近資), 사사노궤(紗紗奴詭) 등의 장수가 참전했다. 이렇게 되자 신라는 대륙과 한반도 두 곳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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