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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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 권우상
  • 승인 2018.08.10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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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고구려 광개토왕은 5만의 병력을 한반도 신라에 보냈다. 그러나 고구려군이 한반도 신라에 도착했을 때는 나라백제(奈良百濟)와 가야(伽倻) 연합군이 한반도 신라의 전역을 다발적으로 공격하여 장악한 상태였고, 도읍인 서라벌까지 유린되어 한반도 신라군은 겨우 도성만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한반도 신라 정복을 눈앞에 둔 나라백제(奈良百濟)와 가야(伽倻) 연합군은 5만의 고구려군이 밀려오자 그 위세에 밀려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각 전선에서 한반도 신라군이 기세를 회복하고 반격에 나서자 나라백제(奈良百濟)와 가야 연합군은 왜지(倭地)로 퇴각했고 중국대륙에서 싸우던 백제군도 후퇴하여 간신히 수비로 버티었다.

중국대륙과 한반도에서 신라 점령에 실패한 백제 아신왕은 502년 왜지(倭地)의 나라백제(奈良百濟)에 사신을 보내 이번에는 고구려 본토 공격을 제의하자 왜왕(倭王) 응신천황(應神天皇)도 이를 받아 들여 404년에 나라백제(奈良百濟) 8천 병력이 800여척의 병선에 나누어 타고 대륙백제의 산동반도 해안에 집결하여 대륙백제군과 함께 고구려 본토 공략에 나섰다. 이 연합군에 가야(伽倻)도 대마도(對馬島)에 주둔한 병력 5천을 출정시켜 대륙백제군과 합세했다.

이무렵 고구려는 중국대륙에서 후연(後燕)과 영토분쟁으로 다투다가 신성과 남소를 빼앗긴 뒤 영토회복을 위해 후연(後燕)의 평주(平州)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후연(後燕)은 평주(平州)를 다시 찾기 위해 고구려와 싸우고 있었다. 이런 상항에서 대륙백제, 나라백제(奈良百濟), 가야(伽倻) 3국 연합군이 고구려 공략에 나선 것이었다.

대륙백제, 나라백제(奈良百濟) 가야(伽倻) 3국 연합군의 첫 공격 목표는 대방(帶方)지역에 주둔한 고구려군이었다. 이 대방지역은 관미성(關彌城) 주변으로 황하와 발해만이 만나는 지역인데 대륙백제 연합군은 이 지역을 먼저 되찾은 후 하북지역으로 진출할 계획이었다. 고구려군은 후연(後燕)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에 대방(帶方)지역까지 신경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고 때문에 대륙백제 연합군은 쉽게 대방지역을 손에 넣었다.

대방지역을 장악한 대륙백제 연합군은 그 여세를 몰아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대륙백제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고구려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후퇴했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구려군과 싸우던 후연군(後燕軍)이 대대적으로 반격했다. 고구려군으로서는 후연(後燕)과 대륙백제 연합군을 상대로 양쪽에서 싸워야 하는 형국이 되었다. 그러자 고구려 광개토왕은 친히 4만의 병력으로 대륙백제 연합군에게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광개토왕의 기세에 눌린 대륙백제 연합군은 평양성 공격을 중지하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결국 백제 아신왕은 나라백제(奈良百濟)와 가야(伽倻)의 지원을 받았지만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을 이기지 못했다. 이런 한(限)을 가슴에 품은 채 아신왕은 재위 14년 405년 9월 생을 마감했다. 아신왕이 죽자 조정 대신들 간에는 누구를 왕으로 추대할 것인가를 놓고 세력다툼이 벌어졌다. 그것은 마땅히 왕이 되어야 할 태자(映)는 왜지(倭地)의 나라백제(奈良百濟)에 가 있었기 때문에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태자를 마냥 기다리며 용상(龍床)을 비워둘 수 없기 때문이었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조정에서는 진씨세력과 해씨세력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두 세력 모두 왕실의 외척이었는데 해씨(解氏)는 대륙백제를 건국한 비류계 부여 왕실 혈통이었고, 진씨(眞氏)는 대륙백제 초기부터 조정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왕비를 배출하는 귀족 집안이었다, 해씨(解氏)가 조정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온조왕 41년에 해루가 우보에 임명되면서부터였다. 그 이전에는 온조의 재종숙부 을음이 우보 자리에 있었다.

진씨세력이 대륙백제 조정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은 해씨보다 조금 늦은 다루왕 10년이었다. 이때 중국대륙 북부지역을 관장하고 있던 진평(眞萍)이 병관좌평 자리에 오르면서 진씨세력은 대륙백제 조정의 주요 씨족으로 등장했다. 진평(眞萍)은 부여 출신이 아니라 중국대륙에 있던 마한(馬韓)출신이었다. 그런 이유로 진씨(眞氏)는 대륙백제가 마한(馬韓)을 병합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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