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조국의 소중함 가슴에 새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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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조국의 소중함 가슴에 새겨야
  • 포항일보
  • 승인 2018.08.14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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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절의 감회가 남 다르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살아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에게는 이 날을 영원히 기억하면서 다시는 우리에게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한다. 1897년 고종은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수립한다. 그 뒤를 이어 고종의 아들인 순종은 1907년 7월에 일제의 강요와 친일 정치인의 매국 행위로 왕위에서 물러나게 된 고종의 양위를 받아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한다. 그후 1910년 8월 29일 마침내 이른바 한일합병조약이 성립되어 대한제국은 멸망한다. 이에 따라 순종은 국가가 없는 이름뿐인 껍데기 왕으로 하위되어 창덕궁에서 머물게 된다. 사실상 유치생활이다. 폐위된 순종은 망국의 한(限)을 달래다 1926년 4월 25일에 승하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왕이 없고 일본의 조선총독이 대한제국을 통치한다. 초대 총독은 ‘데라우찌 마사다케(寺內正毅)’이고 2대는 ‘하세가와 요사미치(長谷川好道)’인데 강력한 조선인 탄압 식민정책을 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제2기는 하세가와(長谷川好道), 제3기는 사이토(齋藤實), 제4기는 야마나시(山梨半造) 총독인데 6월 24일, 총독부 독직사건이 발생하여 야마나시(山梨) 총독은 파면된다. 제5기는 사이토(齋藤實), 제6기는 우가키(宇垣一成), 제7기는 미나미 지로(南次郞), 제8기는 고이소(小磯國昭), 제9기는 아베(阿部信行) 총독시대로 이어진다.

일제 강점기 동안 중국에 망명중인 우리 임시정부 지휘부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웠고 1945년 8월 15일 광복후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미국에 의해 미군정을 실시했다. 미군정청의 최고 군정관은 ‘하지’ 중장이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난 날과 독립국으로서 정부가 수립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매년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 하고 국경일로 지정하였다.

'광복(光復)'이란 '빛을 되찾다'는 뜻으로서 잃었던 국권의 회복을 의미하는데 이 날은 대통령이 참석하는 독립기념관의 경축식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기념행사를 거행하며 전국의 모든 가정에서 태극기를 게양하도록 권장하고, 기념식에서는 정인보가 작사하고, 윤용하가 작곡한 ‘광복절의 노래’가 연주된다. 광복절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투쟁한 순국선열들을 추념하고 민족의 해방을 경축하는 국경일이다. 36년간 우리 민족의 생활은 너무도 굴욕적이고 비참하였다. 기본권 박탈을 물론이고 강제 노동과 강제징병, 징용에 시달리며 우리의 역사, 언어, 문자까지도 탄압에 굴복 당하였다.

그뿐 아니라 심지어 이름과 성씨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하였고 전쟁물자와 식량의 공급을 위한 각종 약탈을 감행하여 괴롭혔다. 이와 같은 온갖 탄압 속에서 조국광복을 위한 지하운동을 맹렬히 벌렸으며 해외에서는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광복군 등의 조직에 의하여 항일 투쟁을 계속한 결과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았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일본제국주의 지배와 침략전쟁의 유산이 완전히 청산되지 않았고, 광복 70주년이 되도록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상황은 광복절을 단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날로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점차 한반도의 통일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기원하는 기념일로서 의미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도 일본은 과거를 반성하기는 커녕 독도(獨島)를 자기네 영토하고 주장하면서 군사대국 부활의 검은 발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목숨을 받친 선열들의 조국애와 나라 없는 슬픔과 비통함을 통감하면서 젊은 세대들은 광복의 의미를 영원히 잊지 말고 조국에 대한 애정을 가슴에 보듬어 안고 내 조국의 소중함을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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