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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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 권우상
  • 승인 2018.08.1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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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회

“무슨 일이라니요. 내가 당신을 부른 것을 몰라서 물어십니까?”

목만치는 헛기침을 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지만 나는 결혼한 후 하루도 남편과 즐거운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없어요. 나도 여자입니다. 하지만 왕비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참고 살아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어요. 지금까지 내가 왕비로 외롭게 살면서 쌓인 한을 풀어 줄 사람은 대감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불렀습니다. 내 마음을 헤아려 주시겠습니까?.”

“허허허..그 일이라면 헤아리고 말구요.”

목만치(木滿致)는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앞에 놓인 찻잔을 비우자 팔수태후(八須太后)는 찻상을 얼른 옆으로 밀치고 꽃무늬로 장식한 창문을 닫고 비단 융단위에 이불을 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발가벗은 채 알몸으로 부둥껴안고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남녀의 춘우(春雨)를 마음껏 쏟아냈다. 모처럼 남자와 성관계를 해보니 팔수태후는 이것이 사는 재미가 아닌가 싶었다. 이렇게 해서 첫 관계로 시작된 인연은 날이 갈수록 마치 부부와 같은 관계로까지 비약되었다. 이렇게 팔수태후(八須太后)와 끈끈한 인연을 맺은 목만치(木滿致)는 수시로 임라(任那)와 대륙백제를 왕래하면서 팔수태후와 욕정의 불꽃을 지폈다.

목만치(木滿致)는 마치 팔수태후(八須太后)의 부군(夫君)처럼 행세를 하면서 권력까지 거머쥐었고 그의 권력은 오만 불순한 행동으로 이어지면서 조정 대신들에게도 반말을 지껄이는가 하면 잔소리까지 하자 급기야는 백제 권력은 목만치(木滿致)에게 넘어가 폭정과 전횡을 일삼았다. 목만치(木滿致)는 임나(任那)를 오가며 대륙백제 정치에 깊히 관여했다.

팔수태후(八須太后)는 목만치(木滿致)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목만치(木滿致)의 폭정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백성들도 들고 일어났다. 이렇게 되자 조정 대신들은 구이신왕과 팔수태후(八須太后)를 몰아내고 목만치(木滿致)를 암살할 계획을 음밀히 진행하고 있었다.

427년 11월 병관좌평 해수(解守)는 군사를 일으켜 어린 구이신왕을 죽이고 팔수태후(八須太后)를 옥방에 가두었다. 팔수태후(八須太后)를 죽이지 않는 것은 팔수태후(八須太后)가 왜왕(倭王)의 딸이기 때문에 함부로 죽였다가는 왜(倭)와 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궁실에 있어야 할 목만치(木滿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목만치(木滿致)에게 매수된 내시(內侍)가 목만치(木滿致)를 죽일려고 한다는 정보를 미리 제공하여 목만치(木滿致)는 사전에 임나(任那 : 대마도)로 도망쳐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옥방에 갇힌 팔수태후는 발가벗은 알몸으로 몸을 요상하게 놀리면서 나체춤을 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를 지켜 본 옥리(獄吏)가 기겁을 하여 옥사정에게 보고하면서 조정대신들이 달려와 보니 여전히 팔수태후는 나체춤을 추고 있었다. 발가벗은 팔수태후를 본 조정 신하들은 팔수태후가 미친 것으로 알고 처리 문제를 놓고 고심에 빠졌다.

이 사실을 안 왜왕(倭王)은 대륙백제에 사신을 보내어 팔수태후(八須太后)를 왜(倭)로 돌려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팔수태후(八須太后)는 죽음을 면하고 사신과 함께 왜(倭)로 떠났다. 하지만 팔수태후와 함께 왜(倭)에 도착한 사신은 팔수태후는 정신병이 아니라 죽음을 면하게 위해 미친 행세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정 대신들 중에는 팔수태후(八須太后)를 죽이자는 여론이 일자 미친 행세를 하여 죽음을 면해 보자는 속셈이였던 것이다.

팔수태후의 폭정으로 구이신왕이 살해되고 427년 12월에 백제 제20대 왕으로 등극한 비류왕은 전지왕의 둘째 아들이며 왕후 해씨(解氏)의 소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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