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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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 권우상
  • 승인 2018.09.14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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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회

동성왕은 부지군(夫只郡)으로 천도한 이후 계속된 혼란을 수습하는데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말기(末期)에 이르러서는 점차 향락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으며 놀기만 했다. 499년(동성왕 21년) 여름,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죽어나가는가 하면 고구려로 도망하는 백성들까지 생겨나자 궁궐의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을 구제하자고 신하들은 상소를 올려 이렇게 진언했다.

“좋은 약은 입에는 쓰지만 병에는 이롭고, 충고하는 말은 귀에는 거슬리지만 행동에는 이롭다고 하였사옵니다. 그러므로 옛날 현명한 임금은 겸허한 자세로 정사를 남에게 물었으며, 온화한 얼굴빛으로 간언하는 말을 수용하면서도 오히려 사람들이 간언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간언하고자 할 때 칠 수 있는 북을 걸어두었고, 비방하는 말을 적는 나무 세우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사옵니다.”

이런 신하들의 간언을 동성왕은 받아들이지 않고, 500년(동성왕 22년) 봄에 부지군(夫只郡) 동쪽에 10미터 높이의 임류각(臨流閣)을 짓자 조정 신하들이 이에 항의하여 간언하는 것을 귀찮아하며 궁궐의 문까지 닫아버리고 궁녀들을 거느리고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이렇게 되자 위사좌평은 백가(苩加)는 신하들에게

“상소가 올라와도 반성하지 않고, 게다가 문을 닫고 거부하였소. 장자(莊子)는 잘못을 보고도 고치지 않으며, 간언하는 말을 듣고도 더욱 심해지는 것을 사납다고 한다 하였는데 아마도 폐하와 같은 사람을 이르는 말일 것이오.”

하면서 중요한 결단을 내릴 것을 암시했다.

501년(즉위 23년) 여름 4월, 동성왕이 우두성(牛頭城) 부근 산에서 사냥하다가 비와 우박이 떨어지자 사냥을 중지하는가 하면 5월에는 극심한 가뭄이 들었지만 동성왕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치와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가운데 가을에는 왕도에서 노파가 여우로 변하여 사라졌고 남산에서는 호랑이 두 마리가 싸웠으나 잡지 못했다는 등의 유언비어(流言蜚語)가 나돌면서 민심은 극도로 흉흉했다.

이런 가운데 동성왕 501년(즉위 23년) 겨울에 음력 11월, 사냥을 나갔다가 폭설을 만나 근처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위사좌평 백가(苩加)는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동성왕에게 칼을 주며 스스로 자결할 것을 권유했으나 동성왕이 이를 거부하자 백가는 칼로 동성왕의 목을 쳐 죽였다. 이때 동성왕의 나이는 37살이었다.

이 무렵 사마(島 : 시마)는 왜지(倭地)의 나라백제(奈良百濟)에 있다가 귀국하여 대륙백제에 머물고 있었는데 동성왕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사마는 유주성(柔州城) 성주 해명(解明)을 시켜 백가(苩加)를 공격했고, 해명(解明)의 군사에게 공격을 받은 백가(苩加)는 스스로 나와서 항복을 하자 사마는 백가(苩加)의 목을 베어 백마하(白馬河)에 던져 버렸다.

사마(島)가 항복을 한 백가(苩加)를 죽여 시체를 강물에 던져버린 것은 역적을 처단하기 위한 명분을 얻기 위한 조치였으며 한편으로는 민심을 얻고 권력을 장악하여 왕위를 차지하려는 야망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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