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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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 권우상
  • 승인 2018.09.19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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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회

백제는 섭라지역에서 물러날 뜻이 없는 것은 물론 섭라(涉羅)가 옛날부터 한반도 백제의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일전도 불사한다는 각오였다. 대륙백제는 군사적으로 압력을 가해오는 고구려에 대해서는 전쟁도 불사할 것이라고 맞불을 놓았고, 백제 무령왕은 양(梁)나라에도 사신을 보내어 섭라(涉羅) 지역의 영유권을 인정해 졸 것을 요구했다. 대륙백제가 이토록 한반도에서 섭라를 중요시하는 이유는 일본열도의 소왕국(小王國)들은 나라백제(奈良百濟)의 정치적인 영향권에 속해 있었고 왜지(倭地)의 소왕국(小王國)들은 중국대륙과 한반도에 있는 백제의 왕족과 신하들이 나라백제(奈良百濟)로 왕래하는 유일한 통로로 이용되고 있었다.

더구나 왜지의 나라백제 조정에서 활동하는 신하들은 대부분 대륙백제인(大陸百濟人)이었다. 그에 비해 가야(伽倻)는 여러 분국(分國)으로 갈라져 있는 힘없는 소국이였고, 국제사회에서도 대제국 백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미미한 세력이었다.

무령왕이 즉위할 때(501년)에 왜지(倭地)의 나라백제(奈良百濟)는 499년에 무열천황(武烈天皇)이 폭정을 일삼고 있었다. 무열천황(武烈天皇)은 임신한 여자의 배를 갈라 그 태를 보고 사람의 생손톱을 뽑아서 산마(山魔)를 케도록 하였으며 머리털을 뽑고 그 사람을 나무위에 올라가게 한 뒤에 나무 밑둥치를 베어 나무위의 사람이 떨어져 죽도록 하기도 했으며, 하천 수문(水門)에 사람을 집어넣고 수문을 열어 센 물살에 흘러나오는 사람을 삼지창으로 찔러 죽이는 행동을 자행하는가 하면 나무위에 사람을 올려놓고 발가벗겨 활을 쏘아 죽이고 여자를 발가벗겨 판자위에 앉히고 말(馬)을 끌고 앞으로 가서 교접을 시키고 여자의 음부를 보고 정액을 흘린자는 죽이고 흘리지 않는 자는 관노(官奴)로 삼는 등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짓을 서슴치 않았다.

게다가 매일같이 창기(娼妓)들을 불러 놓고 음란한 짓거리를 하거나 나체춤을 추게 하는 등 사람이 할 수 없는 변태적인 행위를 일삼으며 주색에 빠져 지내기까지 했다. 501년 11월에 대륙백제 출신의 왕족 의다량(義茤良)이 살해되자 백제 무령왕은 나라백제의 무열천황(武烈天皇) 소행이라고 판단하고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부여 씨 왕족인 마나군(麻那君)을 사신으로 왜지의 나라백제(奈良百濟)에 보냈다.

백제 무령왕과 나라백제 계체천황(繼體天皇)의 관계는 나라백제에 마나군(麻那君)을 사신으로 보내기 전 무령왕이 나라백제에 머물 때 이미 각별한 사이였는데 그때 무령왕은 계체천황(繼體天皇)을 남대적천황(男大迹天皇)이라 불렀다. 남대적(男大迹)은 계체천황(繼體天皇)의 속명(俗名)이었고 무령왕의 속명은 사마였다. 그래서 무령왕을 사마왕이라고도 불렀다. 무열천황(武烈天皇)의 극악무도한 폭정(暴政)이 지속되고 있을 때 나라백제(奈良百濟) 내부에서는 반란의 움직임이 있었고 남대적(男大迹)이 바로 반란의 핵심 인물이었다.

504년 10월에 무령왕이 마나군(麻那君)을 나라백제(奈良百濟)에 보낸 것은 남대적(男大迹)과 연계하여 무열천황(武烈天皇)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남대적(男大迹)은 응신천황(應神天皇)의 5세손인 언주인왕의 아들이었는데 백제 무령왕은 남대적(男大迹)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왕으로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마나군(麻那君)을 사신으로 보낸 것은 무열천황(武烈天皇)을 제거하고 남대적(男大迹)을 천황의 자리에 앉히겠다는 의중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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