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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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 권우상
  • 승인 2018.09.20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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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회

백제 무령왕이 마나군(麻那君)을 나라백제에 보내어 남대적(男大迹)을 지원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백제 출신 신하들은 남대적(男大迹)을 지지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무령왕은 남대적(男大迹)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왕자(아들) 사아군(斯我君)를 나라백제로 보냈다. 나라백제에 건너간 사아군(斯我君)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법사군(法師君)이고 이가 곧 왜군(倭君)의 시조였다.

남대적(男大迹)의 세력에 의해 무열천황(武烈天皇)이 폭정(暴政)으로 살해되자 나라백제 조정의 장관격인 대반대련, 금촌은 조정 중신들과 의논하여 중애천황의 왜언왕(倭彦王)을 천황에 앉히려 했지만 왜언왕(倭彦王)은 살해될까 염려스러워 은신해 버렸는데 이는 남대적(男大迹)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왜언왕(倭彦王)이 숨어버리자 대반대련, 금촌 등 중신들은 남대적(男大迹)을 왜(倭)의 천황으로 추대하였다.

왜지(倭地)에 있는 나라백제(奈良百濟)의 천황에 오른 남대적(男大迹 : 繼體天皇)은 이때 본부인이 있었지만 수백향(手白香) 황녀를 황후로 삼았다. 그 이유는 수백향(手白香)이 남대적(男大迹)을 천황 자리에 앉히는데 큰 역할을 한 백제 세력가 출신이었다. 이 때문에 수백향(手白香)은 황후(皇后)에 책봉되기전에 이미 황녀(皇女)의 신분이었다.

대륙백제사람 중에 황녀로 불릴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무령왕의 딸 뿐이었다. 결국 무령왕은 자신의 딸을 나라백제의 계체천왕(男大迹)의 부인으로 만들어 계체천황(繼體天皇)은 무령왕의 사위가 된 것이었다. 백제 무령왕의 이런 계략은 왜지(倭地)에 있는 나라백제(奈良百濟)를 확실하게 속령으로 통치하기 위해서였다. 나라백제의 천황에 오른 계체천황(繼體天皇)은 백제 무령왕이 칙서를 달라고 하자 계체천황은 나라백제에 대한 영유권은 대륙백제에 있다는 내용의 칙서(문서)를 백제 무령왕에게 전달했다.

계체천황(繼體天皇)이 나라백제의 왕에 오르기 전에도 계체천황(繼體天皇)과 무령왕은 각별한 사이였다. 나라백제의 무열천황(武烈天皇)이 폭정을 일삼으며 나라를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을 때 무령왕은 유망한 정치세력이던 남대적(男大迹)에게 구리거울(인물화상경)을 보내어 정치적인 지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나라백제(奈良百濟)의 계체천황(繼體天皇)은 한반도의 가야땅 섭리(涉羅) 영유권은 한반도 백제에 있다고 주장하고 나서자 가야(伽倻)는 나라백제에 등을 돌리고 한반도 신라에 손을 내밀었다. 그동안 유지해 오던 왜지(倭地)의 나라백제와 가야의 공조가 깨진 것이었다. 한반도 백제에게 섭라(涉羅)를 빼앗긴 가야분국(伽倻分國)은 힘을 합쳐 한반도 백제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싸울 것을 결의했다. 가야분국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국가는 반파국(伴破國 :고령과 성주 일대의 대가야)이었다. 반파국(伴破國)을 주축으로 한 가야연합군은 자탄(子呑 : 거창)과 대사(大沙 : 하동)에 토성을 쌓아 만거(滿棨 : 함양)에 연결하고 봉화를 올리는 곳과 식량을 두는 창고를 만들어 한반도 백제군에 대비하였다.

또한 마열비(穈列比), 마수비(麻須比)에 성(城)을 쌓고 마구거(麻具棨). 추봉(椎封)에 연결하였다. 그 만큼 가야로써는 섭라(涉羅)를 한반도 백제에 내어 줄 수 없어 일전을 각오했다. 가야분국은 급히 신라에 사신을 보내야 원군(援軍)을 요청했지만 신라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라는 언제가는 자신들이 가야땅을 차지하겠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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