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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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 권우상
  • 승인 2018.10.22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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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회

무왕은 즉위하자 백제는 중국대륙과 한반도에서 수년간 전쟁없이 평온하게 지냈다. 그러나 백제 무왕은 선왕대(先王代)에 대륙신라와 고구려에게 빼앗긴 옛 영토를 되찾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첫 번째 전쟁은 무왕 재위 3년(602년)에 중국대륙에서 일어난 아모산성 싸움이었다. 무왕은 그 해 8월에 대장수 해수(解需)에게 3만여 명의 병력을 주자 해수(解需)의 군대는 아모산성을 포위하였고, 이에 대륙신라의 진평왕은 장수 김려(金侶)에게 정예기병 2만여 명을 주어 대륙백제군과 맞서 싸우게 했다.

대륙신라는 소타, 외석, 천산, 옹잠 등에 각각 토성을 쌓고 대륙백제의 영토를 공격해 들어 왔다. 그러자 위기의식을 느낀 백제 무왕은 전면전을 벌이며 병력 4만여 명을 동원하여 소타, 외석, 천산, 옹잠 등 대륙신라의 성(城) 네 곳을 공격하자, 신라 진평왕은 장수 무은과 건품에게 백제 장수 해수(解需)가 거느린 군대를 상대케 했는데 대륙백제 대장수 해수(解需)는 대륙신라 장수 무은과 건품의 군사들에게 패하여 천산(天山 : 중국대륙) 서쪽 소택지로 퇴각하여 복병(伏兵)을 숨겨 놓고 대륙신라군을 기다렸다. 그것도 모르고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대륙신라의 장수 무은은 기마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소택지(小澤地)까지 추격해 왔다. 그때 대륙백제 장수 해수(解需)의 복병(伏兵)이 기습을 하자 대륙신라의 장수 무은은 우왕좌왕 하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무은은 몹시 당황하여 사색이 되었지만 그의 아들 귀산과 장수 추항이 창을 휘두르며 활로를 뚫기 시작했다.

비록 그들은 이 과정에서 죽었지만 그들의 살신성인은 대륙신라군의 사기를 크게 높이고 전의를 불살랐다. 이로 인해 전세는 역전되어 대륙백제의 대장수 해수(解需)는 부하들을 모두 잃고 혼자 겨우 살아남아 도주했다. 이렇듯 백제의 무왕은 중국대륙에서 신라와의 첫 싸움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듬해 8월(603년)에 대륙백제는 한반도에서 고구려가 한반도 신라의 북한산성을 침입하고 한반도 신라는 병력 1만여 명으로 고구려군과 싸움으로써 삼국은 험란한 전쟁 양상으로 돌입했다. 그야말로 한반도에서는 아군과 적군이 따로 없는 혼란스런 상황이 전개되자 백제 무왕은 중국대륙에서 대륙신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605년 2월에 각산성을 쌓았는데 예상대로 그 해 8월에 대륙신라군이 대륙백제 동쪽(절강성) 변경을 공격해 왔다.

그러나 대륙백제군은 이를 잘 막아냈다. 616년 10월에 백제 무왕은 달솔(達率) 기려(己侶)에게 군사 3만여 명을 주어 대륙신라의 가잠성(加箴城)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그러자 대륙신라는 2년 뒤인 618년 9월에 장수 변품을 앞 세워 대륙백제가 차지했던 가잠성을 공격하여 그곳 성주(城主) 해논(解菕)을 죽였다. 해론(解菕)은 대장수 해수(解需)의 아우로 무예가 걸출한 장수였다.

이런 장수를 잃은 백제 무왕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623년 8월에 대륙신라의 늑노현(勒蘆縣)을 공격하였고, 624년 5월에는 대륙신라의 속함. 앵잠, 기잠, 기현, 용책 등 다섯 개 성(城)을 동시 다발적으로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대륙신라군의 기세를 제압하였다.

또한 백제 무왕은 626년 4월에는 대륙신라의 왕재성을 공격하여 그 곳 성주 동소를 죽였으며, 이듬해 2월에는 장수 사걸을 내세워 대륙신라 북부 변경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5백여 명을 포로로 잡아 왔다. 백제 무왕(武王)은 이때부터 중국대륙과 한반도에서 신라와 전면전을 선언하고, 중국대륙의 웅진성(雄津城)에 30만 대군을 집결하여 대륙신라에게 빼앗긴 백제 영토 회복전에 나섰다.

신라의 진평왕은 이 소식에 지레 겁을 먹고 당(唐)나라에 사신을 급히 보내 조공을 받치고 당나라 태종의 의중(意中)을 살폈다. 당나라 태종은 대륙신라와 대륙백제 그리고 고구려 사신을 모두 불러 모아놓고 전쟁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며 백제 무왕에게도 조서를 보내 대륙신라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청했다. 백제 무왕은 일단 당(唐)나라에 표문을 올려 전쟁을 중지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백제 무왕은 실제로는 전쟁을 중지할 생각은 없었다. 무왕은 626(즉위 27년)에 ‘사신을 당에 보내어 명광개(明光鎧)를 바치고, 고구려가 길을 막고 상국에 내조(來朝)할 것을 용허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고구려가 당(唐)나라로 가는 대륙백제 사신의 길을 막았다는 말은 예전에는 길이 있었다는 말이다. 즉 당나라와 대륙백제 사이에 있는 땅을 당시 고구려가 임시로 점령했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육로를 택한 것이지 지금의 반도사관대로라면 애당초 해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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