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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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 권우상
  • 승인 2018.10.25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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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회

通考 所云亦在 髙麗東南 奉使行程錄所云 自咸州至同州 (今開原 鐵嶺界) 東望大山 即新羅界 遼志所云海州 (即今海城 始屬百濟 後為髙麗所分 復入渤海 又歸于遼) 東界新羅是也 唐顯慶乾封以後 百濟髙麗之地 多入新羅 東西增九百里 南北增千餘里

『통고』에는 “또한 고구려의 동남에 있다”고 하였다. 『봉사행정록』에는 “함주咸州로부터 동주同州 (현 개원 철령경계)에 이르고, 동쪽으로 대산을 바라보는데 곧 신라의 경계이다”라고 하였다. 『요지遼志』에는 “해주海州 (현 해성, 처음에는 백제에 속하다가 뒤에 고구려에 의해 분할되었고 다시 발해에 합쳐졌다. 다시 요나라에 병합되었다.)의 동쪽경계는 신라이다”라고 하였다.

당 唐 현경顯慶 건봉乾封 이후 백제와 고구려의 땅이 많이 신라에 편입되었는데 동서로 구백리가 더하여 졌고 남북으로 천여리가 더하여 졌다.

幅員益廣而 唐人篇什往往 以海外稱者 葢西北 為渤海契丹 所隔 必浮海往來 始達其南境 故耳洎 開元元和之際 渤海愈盛 鴨綠江以北 皆為渤海所有 遼志所謂 渤海王大仁秀 南定新羅 開置郡邑是也

폭과 둘레가 더욱 넓어졌다. 당나라 사람이 자주 왕래하였고, 해외에서 말한 것을 보면 모두 서북이 발해거란에 막혀있어서 반드시 바다를 건너 왕래하는데, 처음에는 그 남쪽경계에 도착하여 정박한다고 하였다. 개원開元 원화元和 무렵에 발해가 점차 강성해져서 압록강 이북이 모두 발해의 소유가 되었는데 『요지遼志』에 말하길 “발해왕 대인수 大仁秀 가 남쪽으로 신라를 정벌하고 군 읍郡邑을 설치하였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後唐清泰末 髙麗復起 王建襲據 新羅邊邑 建都松岳 元史所謂 在鴨淥江 東千餘里 非平壤之舊者是也 于是新羅 所有僅海城印 及朝鮮數道 非復唐時之境 而自五代 至遼傳國 依然不絶也 至雞林即吉林 雞與吉音既相符 核諸地里亦合葢

후당(後唐) 청태(清泰)말에 고구려가 다시 일어났는데, 왕건王建이 신라의 변두리 읍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송악(松岳)에 도읍을 세웠는데 원사에 “압록강 동쪽 천여리에 있는 것은 옛 평양(平壤)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때에 신라는 겨우 해성(海城)의 동쪽과 조선의 여러 개 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당나라 시절때의 땅을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오대五代 이후 요(遼)나라에 이르기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계림(雞林)은 곧 길림吉林인데 계(雞)와 길吉의 발음이 서로 부합하고 더욱 핵심적인 것은 지리가 또한 모두 부합한다.

중국대륙의 신라(新旯) 영토는 용암시(현재 新羅區) 복건성의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구룡강 상류에 있고, 하문(廈門)과 마카오 등지에서 200k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신라구(新羅區)는 민서의 정치, 경제, 문화와 교통의 중심지이며, 민남의 금삼각(金三角)의 복부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중국은 1981년 현을 없애고 시를 두었다가 1997년 3월 용암시에 신라구를 설치했다. 3개향과 12개의 진과 12개의 가도 사무소가 있으며, 면적은 2,677 평방미터이고 인구는 45만명이다. 홍콩, 마카오, 대만과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가 10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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