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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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 실록소설] 일본이 탄생한 건국비화
  • 권우상
  • 승인 2018.11.07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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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회

그런데 달솔 상영은 당나라군에게 기벌포(白馬河의 포구)를 열어주고 당나라군을 탄현군으로 끌어 들여야 한다는 엉터리 전술을 내놓은 터라 의자왕의 신임을 잃은 상태였다. 그래서 5천 결사대를 이끌 장수는 계백이었다. 장수 계백은 백제의 운명을 짊어지고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黃山)으로 말을 타고 달려갔다.

(중국대륙 산동성에 있는 황산은 신라 때 중국의 황산(黃山) 이름 그대로 한반도 있는 황산(충남논산)으로 사용하였기에 대륙백제가 나당연합군과 싸운 장소는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대륙에서 있었던 황산의 전쟁임을 밝힌다)

결사대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아내와 자식들을 모두 칼로 목을 베어 죽였다. 살아서 신라인의 노비로 사는 치욕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비장한 각오로 황산(黃山)에 이른 장수 계백은 세 곳에 진(陣)을 치고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군사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용감한 백제 군사들이여! 옛날 월(越)나라 구차왕은 5천의 군사로 70만의 오(吳)나라 대군을 격파하였다. 오늘 우리는 각자 분발하여 싸우고 승리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그러자 말 위에서 창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우와! 하는 결사대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장수 계백은 더욱 목이 터져라 큰 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승리를 다짐한다!”

창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우와! 하는 결사대의 함성이 또 한번 천지를 진동했다. 장수 계백이 소리친 말은 월(越)나라 구천왕의 5천 군대는 오(吳)나라 70만 군대와 싸워 이겼는데 백제 결사대 5천으로 신라의 5만 군대를 이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며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또한 자신은 이미 처자식을 죽이고 온 몸이라 죽을 각오로 싸울 준비가 되었다는 비장한 각오와 군사들 역시 사소한 개인의 처지를 생각하지 말고 오직 나라를 위해 싸우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말도 덧붙혔다. 장수 계백의 확신에 찬 말에 부하들은 사기가 높았고 그것은 일당 백이 아니라 일당 천의 전투력으로 나타났다.

한편 대륙백제를 치기 위해 신라 무열왕은 660년 1월에 상대등 금강이 죽자 김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노심초사 당나라의 지원군 파병 소식을 기다렸다. 마침내 당나라 좌부위 대장군 소정방을 대총관으로 삼고 당나라에 숙위하던 무열왕의 아들 김인문을 부총관으로 삼아 13만 군사를 원군으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에 대륙신라 무열왕은 전 병력을 동원하여 중국대륙에서 당나라군과 백제를 협공할 계획을 세웠다.

당나라 대장군 소정방은 660년 7월 10일에 대륙백제 도성(소부리군)을 칠 계획이었다. 대륙신라 무열왕은 태자 법민과 장수 김유신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당나라 소정방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자신은 금돌성에 머물었다.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황산(黃山)에 도착한 것은 7월 9일(660년)이었고 이때 백제에서는 장수 계백이 5천의 결사대로 대적해 맞섰다. 하지만 군사의 수가 적어 방어전으로 나섰다. 이때가 7월 9일이었다.

드디어 황산(황山)의 광할한 평원(平原)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그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치열한 전쟁이었다)

“공격하라. 공격하라!”

대륙신라군 진영에서 공격을 알리는 소라 나팔소리가 부웅 부웅! 하고 울리자 대륙신라군의 제1진으로 선봉에 섰던 기마병은 창검을 뽑아 들고 일제히 말을 달려 대륙백제군 진영으로 향해 돌진했다. 말발굽에서는 뽀얀 먼지가 구름처럼 일면서 황산 벌판을 하얗게 적셨다. 전투가 시작되면서 군사들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칼과 칼이 부딪치고 창과 창이 두딪치면서 혈전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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