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소설] 그 여자와 멋진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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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소설] 그 여자와 멋진 남자
  • 권우상
  • 승인 2017.10.1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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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제1부

내가 경북 김천에 가서 살게 된 것은 그쪽으로 시집을 갔기 때문이다. 남편은 나보다 세 살 많았고, 나는 29살이었다. 여자 나이 30이 가깝도록 시집을 가지 못하고 있던 나는 평소에 어머니와 잘 알고 지내는 이웃 아줌마의 소개로 남편과 결혼했다. 서로 성품이나 기질을 모르는 남자와 결혼을 한다는 것이 나로써는 아무래도 마음에 탐탁치 않았다.

그래서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하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남과 남이 만나는데 어찌 마음에 쏙 드는 남자가 있겠느냐. 서로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살다보면 없는 정도 생기는 게다. 결혼 하자는 남자가 나타날 때 망설이지 말고 해라.”

하지만 나는 어쩐지 이 결혼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결혼은 해서는 안될 것만 같았다. 사람이란 예감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남자와의 결혼은 왠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한테 이 남자와 결혼은 안하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그럼 한평생 노처녀로 늙고 싶어서 그러냐?”

하면서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결혼은 때가 있는 법인데 혼기를 놓치지 말고 해야 한다고 강요했다.

나는 한편 생각해 보면 어머니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이번 기회를 놓쳐 오랫동안 결혼을 하지 못하면 이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지울 것 같았다. 아버지도 어머니처럼 이 남자와 결혼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지만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봐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워낙 부모님의 강요가 강해 나는 부모님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결혼을 하기로 결심 하였다.

결혼식 날이었다. 나는 예식장 안에 있는 미장원에서 머리 손질을 하느라 의자에 앉아 있는데 왜 그런지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뇌리에 엄습해 왔다. 머리 손질이 끝나고 웨딩드레스를 입는 순간 불길한 예감은 더욱 내 영혼을 감싸 않았다. 지금 여기서 결혼을 거부하기에는 너무 깊숙이 들어온 것 같았다. 결혼식 진행 시간은 1분 2분 초조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머니의 말씀처럼 살다보면 없는 정이 생길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어쩐지 이 남자와는 정이 들것 같지도 않았고 부부 인연도 아닌 것 같았다. 웬지 자꾸만 불길한 생각만이 머리에 파고 들었다.

드디어 예식장에 입장할 시간이 왔다. 사회자가

“신랑 신부 입장이 있겠습니다.”

하는 말이 나오자 나는 아버지의 팔에 이끌려 웨딩마취 음악에 맞추어 한 발 두발 예식장으로 들어갔다. 그때 나는 마치 황소가 억지로 도살장에 끌려 들어가는 듯한 불길한 느낌을 받았지만 이제는 여기까지 온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결혼을 거부하기엔 너무 늦었다.

이제는 어머니의 말처럼 ‘살다보면 정이 들겠지’ 하는 생각뿐이다. 또한 그렇게 되기를 나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신랑 최영철 군은 아내 강민숙을 사랑합니까?”

사회자의 질문에 남편은 ‘예’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나에게 물었다.

“신부 강민숙 양은 남편 최영철 군을 사랑합니까.”

나는 ‘예’ 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아니라고 대답했으면 이 결혼은 어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에 번쩍하고 스쳐 지나났다.

‘이 결혼은 아니야 이 결혼은 무효하라고......’

나는 가슴 속에서 혼자 이렇게 을부짖으며 외치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은 제주도로 갔다. 이렇게 해서 나의 결혼생활은 불길한 예감속에서 시작되었고, 나는 남편을 따라 시댁인 경북 김천에 가서 신혼생활을 꾸렸다.

남편은 김천(金泉)에서 전문대학을 나왔다고 하지만 정말로 나온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에는 전문대학을 나온 모습이 전연 묻어 있지 않았다. 물론 전문대학은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들어가는 학교가 아니긴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남편에게는 그런 모습이 전연 보이지 않았다.

남편은 김천 외각 변두리 지역인 농소면에서 과수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과수원 규모는 1,500평 정도가 되는데 500평 정도는 복숭아 밭이고 나머지는 사과밭이었다. 그리고 사과밭 안에 단층주택을 지어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과수원은 봄부터 가을까지가 매우 바쁘다. 대부분 농촌이 그렇듯이 겨울에는 농한기라 비교적 한가하다. 그러다 보니 노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자 남편은 틈만 나면 늘 컴퓨터에 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게임을 하다가 인터넷 도박을 알게 되었다. 처음엔 심심풀이로 했지만 2년이 지난 후에는 도박에 중독이 되어 버렸다.

돈을 잃으면 잃는 돈을 찾기 위해 손을 떼지 못했고, 돈을 따면 따는 재미로 손을 떼지 못했다. 이때 남편을 보면서 인터넷 도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았다. 하지만 남편은 이미 중독상태에 빠져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시어머니는 남편이 도박에 중독된 것은 내가 남편을 잘못 보살펴 일어난 일이라고 그 책임을 나에게 뒤집어 씌웠다. 그 일로 시어머니는 나를 몹시 핍박하기 시작했다. 나를 핍박하는 강도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그제야 나는 처음부터 하기 싫은 결혼을 한 것을 후회하였다. 내가 이렇게 될려고 그처럼 결혼을 하기 싫었구나 싶었다. 참으로 가슴이 메어지듯 후회스럽고 통탄할 일이었지만 이미 깊은 늪에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남편이 도박에서 손을 떼고 과수원 일에 전념하도록 온갖 노력을 다했다. 도박을 하지 않도록 남편을 달래보기도 하고, 두 손을 잡고 매달려 애원을 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은 이미 도박의 깊은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일년동안 뼈빠지게 과수원에서 번 돈은 인터넷 도박으로 거의 다 날리다시피 하였다.

그래도 나는 남편의 마음을 바꾸어 어떻게 해서든 함게 살아 볼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일 년이 가고 이 년이 가면서 나는 피눈물나는 노력으로 뼈저린 마음 고생을 참고 견디며, 어떻게 하던 이혼만은 막아 볼려고 노력했다. 그런 세월이 6년이나 흘렀다.

그 동안 나는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았다. 딸은 6살이고, 아들은 4살이다. 나는 남편에게 아이들도 점점 성장해 가니 제발 좀 정신차리라고 애원했지만 남편은 잃은 돈은 반드시 찾아야 한다면서 좀처럼 도박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해 가을이었다. 김천에서 KBS 노래자랑대회가 열렸다. 나는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 불렀다. 이미자처럼 유명한 가수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결혼하기 전부터 이미자의 히트곡인 <동백 아가씨> <섬마을 선생> <흑산도 아가씨> 등을 즐겨 불렀다. 가끔 고향 충주에서 축제 행사가 있으면 나가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노래를 잘 부른다고 칭찬하면서 앞으로 가수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가수가 되는 꿈을 가슴 속에만 담아 두었지 실제로 가수로 나갈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남편과 결혼을 한 것이다. 김천에서 KBS 노래자랑대회가 열리기 전에 나는 과수원 일을 하면서 틈틈이 노래 연습을 했다. 이미자가 부른 노래라면 이것 저것 여러 가지를 연습했다. 그러다가 나는 출전 곡목(曲目)을 주현미가 부른 <비내리는 영동교>로 결정하고 이 노래를 집중적으로 연습했다. 주현미의 목소리를 빼닮은 발성연습도 했다.

밤비내리는 영동교를 홀로 걷는 이마음

그 사람은 모를거야 모르실거야

비에 젖어 슬픔에 젖어 눈물에 젖어

하염없이 걷고 있네 밤비내리는 영동교

잊어야지 하면서도 못잊는 것은

미련 미련 미련 때문인가봐.

 

밤비내리는 영동교를 헤메이는 이마음

그 사람은 모를거야 모르실거야

비에 젖어 슬픔에 젖어 아픔에 젖어

하염없이 헤메이는 밤비내리는 영동교

생각말자 하면서도 생각하는 건

미련 미련 미련 때문인가봐.

그 날도 나는 혼자 과수원에서 나뭇가지를 치는 작업을 하다가 잠시 일손을 놓고 복송아 열매 하나를 마이크처럼 손에 잡고 <비내리는 영동교>를 부르고 있었다. 한참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남편이 와서 나에게 주먹질을 하면서 폭언을 하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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