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장편소설] 그 여자와 멋진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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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장편소설] 그 여자와 멋진 남자
  • 권우상
  • 승인 2017.10.12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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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이 여편네가 술집 가시나가 될려꼬 카나 일하다 말고 노래는 무신 노래고? 이 여편네가 정신이 나가도 한참 나갔데이… 콱 지기삐릴라…”

순간 나는 망치로 뒷뚱수를 한 대 얻어 맞은 듯 머리가 띵해 왔다. 전문대학도 대학인데 대학 나온 사람이 자기의 아내에게

“콱 지기삐릴라…”

하는 말에서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제야 하는 아내의 위치를 상실했다고 생각했다. 정녕 남편이 나를 아내로 생각한다면

“당신이 노래가 얼마나 부르고 싶어 일을 하다가 노래를 부를까. 그래 일은 내가 할테니 열심히 연습해서 노래자랑대회에 나가 일등을 해 봐.”

이 정도의 말을 하는 것이 남편이 된 도리라고 할까 모습이 아닌가 싶어 무척 섭섭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말했다.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신 나간 것은 내가 아니구 당신이예요. 당신이야 말로 정신이 나가도 한참 나갔어요”

“뭐라꼬? 이 여편네가 주둥아릴 놀리는 거 봐레이... 내가 정신 나갔다꼬?”

“정신 안나가면 매일 컴퓨터에 앉아 인터넷 도박이나 하구 있어요?”

“이 여편네가 그래도 주둥이만 살아 갔꼬시나 나불거리네... 이 씨발년아…”

씨발년이란 말에 나는 또 한번 머리가 띵해 왔다. 그런데 그 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삽자루가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얼굴에 부딪쳤다. 남편이 일을 하느라 손에 든 삽으로 내 얼굴을 찍은 것이다. 나는 삽자루에 맞고 얼굴에서 피를 쏟으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나는 잠시 정신이 멍하고 머리고 지끈지끈 아파서 땅바닥에 쓰러진 채 신음을 하며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과수원에서 놀다가 이 광경을 보던 6살짜리 딸 윤정이가 달려왔다.

“엄마 왜 이래… 누가 엄마를 이렇게 했어.. 말해봐 누군지…”

“아니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 내가 실수를 했다구…”

“뭐가 실수야… 아빠가 삽으로 찍어 맞았자나… 아빠가 그랬지? 아빠가 맞지?”

“그래 아빠가 찍은 건 맞는데 잠시 화가 난 모양이야…”

“거짓말… 무슨 화가 나. 엄마가 노래 부른다고 아빠가 일부러 그랬자나…”

윤정이는 몹시 화가 난 얼굴이었다. 나는 일어나 얼굴에서 흐르는 피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윤정이를 이끌고 집으로 걸어 갔다. 방안에 들어 온 나는 코피가 나고 눈부위가 찢어진 얼굴을 우선 수건으로 싸메었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119 구급대를 불렀다. 잠시후 구급차가 달려와 나는 병원으로 실려 갔다.

병원에서 열 일곱 바늘을 꿰멘 후 병실에 입원한 나는 누워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부부란 것이 무엇인가?

남편이 나에게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지?

나는 마음속에서 남편에서 오만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잠시 노래를 부른다고 이럴 수가 있나 싶어 남편이 몹시 섭섭했다. 아니 섭섭할 정도가 아니라 괫심하기까지 했다. 이제는 헤어질 때가 되었구나 싶었다. 팔자에 없는, 인연이 아닌 남자와 만나 이런 일이 일어났구나 싶었다. 하지만 잘못 만난 악연 치고는 너무나 가슴에 상처가 컸다. 집에서 기르는 개도 보기 싫으면 시장에 내다 팔던가 해야 하듯이 사람도 보기 싫으면 떠나야 하는구나 싶었다.

머리의 상처로 한 달 가량 병원에 입원해 있었지만 남편은 한 번도 문병을 오지 않았다. 가끔 시어머니가 문병을 와 남편의 소식을 물으면 여전히 컴퓨터 게임으로 도박을 하고 있다는 말 뿐이었다. 그러면서 그 책임을 내탓으로 돌렸다. 게다가 시어머니는 남편을 화나게 한 것은 며느리 탓이라고 하면서 나이게 이렇게 말했다.

“여자가 일하다가 노래를 부르니께 니 서방이 화가 난 거 아이가. 기생사당년이 될라꼬 카나 일하다가 노래는 무신 노래고?”

그런데 얼굴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나는 또 다시 심한 복통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가끔 복통이 있긴 했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심하게 아파본 적은 없었다. 최근에 와서 생리도 불순하고 생리주기도 일정하지 않았지만 그럴 수도 있거니 생각했는데 통증이 너무 심해 진찰을 해 보니 자궁근중이라고 하였다. 나는 수술을 받느라 얼굴 상처에 이어 다시 개복 수술을 하여 이십 여일간 더 입원하게 되었다.

자궁근종 수술도 끝나고 머리 상처도 아물어 내가 퇴원해서 집에 와보니 남편은 장수연이란 여자와 이미 동거하고 있었다. 이 일로 나는 남편과 자주 다투게 되었고, 남편은 나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면서 폭력까지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웃에 사는 장수연은 경남 진해에서 나와 같은 고등학교 같은 반 친구였다. 장수연은 나와 동갑내기로 부모와 함께 나보다 일찍 김천으로 이사왔는데 내가 과수원에서 일을 할 때면 가끔 와서 일을 도와주기도 하면서 내 남편과 서로 알게 되었고. 내가 석달 동안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사이 장수연은 내 남편을 꼬더겨 동거를 해 버렸다.

나는 남편과 10여년 동안 살면서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았다. 딸 이름은 최윤정이고 아들 이름은 최동석이다. 두 아이 양육은 남편이 맡기로 하고 나는 위자료 3천만원만 손에 달랑 쥐고 합의 이혼하여 혼자 경북 경주에 와서 살았다. 이혼 한 사실을 친정 부모님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알리면 마음 고생이 심할까 싶어서였다.

이듬해 나는 이웃에 사는 아줌마의 소개로 조기훈과 결혼했다. 이웃 아줌마는 내가 얼굴도 예쁘고 혼자 살고 있는 걸 보고는 나를 조기훈에게 중매했고, 나는 두 번째로 조기훈과 결혼하였다. 조기훈은 나와 동갑인 총각으로 40살이 넘어도 직업이 없어 장가를 가지 못하고 있다가 나를 만났다.

비록 시골이긴 하지만 이런 남자라면 일생의 동반자로 살아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서울에서 명문대학 법대를 나와 사법시험 준비를 한다면서 직업이 없긴 해도 농토가 있다고 하니 먹고 사는데는 큰 불편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더구나 시부모 될 사람은 남편에게 뚜렷한 직업이 없자 가게를 하나 차려서 부부가 오붓하게 살도록 해 준다고 하였다. 남자 나이 마흔에 얼굴이 나보다 더 예쁜 여자를 찾다가는 영영 아들을 장가 보내지 못할 것이라는 남자 부모님의 조급함에 조기훈도 얼굴이 예쁜 나를 보자마다 결혼을 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내가 조기훈과 결혼을 해 보니 이번에도 잘못 결혼했구나 싶었다. 하지만 이미 또 다시 엎어진 물사발 꼴이 되었다. 시부모님이 가게를 내주겠다면서 가게를 알아보려 다니는 것은 경주 변두리 시골에서 코딱지 만한 구멍가게였는데 그것도 얻는다는 시늉만 하고 다녔다. 진실로 가게를 얻어 나와 남편이 먹고 살도록 해주겠다는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아들이 사법시험 합격하기를 바라고 있으니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굳이 시골에서 가게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때까지 내 마음을 다독거려 놓기 위해 가게를 얻는다는 시늉만하고 다녔던 것이다. 혹여 내가 남편의 직업이 없어 결혼을 하지 않을까 해서였던 것이다.

남편은 직업이 없다보니 하루 종일 컴퓨터에 앉아 게임만 하고 있었다. 전 남편이었던 최영철과 꼭 빼닯은 모습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두 남자가 하는 행동이 닮았을까? 더구나 사법고시에 3번이나 낙방하고 보니 이제 사법시험에도 흥미를 잃은 듯 보였다. 결혼하기 전에는 농토라도 제법 있는 줄 알았는데 막상 결혼해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제야 하는 또 다시 잘못 결혼했다는 것을 알고 문제가 있는 남자와 잘못한 결혼은 하루라도 빨리 이혼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만 이미 나는 벌써 임신이 되었고, 남편의 구박은 갈수록 미친사람처럼 극심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첫 결혼에 실패하고 두 번째 결혼이라 어떻게 하던 이혼만은 막아 볼려고 온갖 수모와 고통을 가슴 속에 혼자 묻어 삭이며 참고 살았다. 만약 친정 부모님에게 알리지 않고 결혼한 사실을 알면 친정 부모님께서 병이 나서 들어 눕기라고 하지 않을까 싶어서 어떻게 하던 친정 부모님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살아볼려고 남편의 혓바닥처럼 움직이며 죽어라고 하면 죽은 시늉도 할만큼 피눈물나는 노력을 했다.

직업이 없는 남편은 하루종일 게임을 하느라 컴퓨터에 앉아 있다 보니 나는 아무리 참아도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일 컴퓨터에만 앉아 있지 말고 무슨 일이라도 직업을 찾아보라고 하였다. 정말 서울에서 명문대학 법대를 나온 사람이 맞는가 싶었다. 이 일로 나와 남편은 말다툼 하는 날이 많아졌다. 게다가 시누이까지 남편과 합세하여 나를 구박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자라 시어머니까지 남편의 편을 들며 나를 심하게 구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편은 마마보이라 내 말은 듣지 않고 시어머니 말만 들었다. 시어머니가 죽어라고 하면 왜 죽느냐고 따지지 않고 죽는 시늉도 하는 그런 남자였다.

그런 가운데에서 나는 3년을 버티면서 살았다. 하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나하나 없어지는 것이 편할 것 같아 죽을려고 바닷가로 나갔다. 파도가 밀려 왔다가 밀려 가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삶이란 결국 저 파도처럼 어느 날 이 세상에 왔다가 한 순간의 포말로 사라지는 것이구나 생각하니 인간이란 존재가 무척 초라하게 보였다.

깊은 바다 속으로 한 발 두 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아차! 하는 생각에 이건 아니구나 싶었다. 바다 깊숙이 몸을 들여 놓던 나는 반사적으로 바닷가 모래밭으로 나왔다. 그리고 주저 앉아 울었다. 한참 울다가 얼굴을 들고 보니 저녁노을이 수평선으로 조용히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남편에게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 어디 갔다가 오느냐면서 주먹으로 내 얼굴을 마구 내리치기 시작했다. 너무나 아프고 고통스러워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않아 울기만 했다. 그 일로 나는 얼굴에 멍이 들고 턱뼈가 변형이 이상한 형체의 얼굴이 되어 버렸다. 이 문제로 나는 3년만에 이혼하게 됐고 내가 가져온 짐을 챙겨 집을 뛰쳐 나왔다. 더 이상 남편과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낳은 아들도 넘겨 주고 위자로 한 푼 받지 않고 그대로 몸만 빠져 나왔다. 더 이상 시댁 식구가 보기 싫었고 위자료 문제로 태각태각 다투고 싶지도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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